새들의 역사 창비시선 280
최금진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와 죽음
[시를 말하는 시 32] 최금진, 《새들의 역사》

 


- 책이름 : 새들의 역사
- 글 : 최금진
- 펴낸곳 : 창비 (2007.10.15.)
- 책값 : 8000원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기에 죽습니다. 스스로 산다고 생각하기에 삽니다.


  무더운 여름날 이어지는 새벽녘에 큰아이가 문득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버지, 방에 모기 있어요. 잡아 주셔요.” 잠결에 큰아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부시시 일어납니다. 부시시한 눈으로 부시시하게 앉아서 모기가 내 팔뚝이나 허벅지에 내려앉기를 기다립니다. 아직 날이 훤히 밝지 않은 때라 모기가 어디쯤 날아다니는지 안 보입니다. 소리로만 어디쯤 있구나 하고 느끼며 기다리니 왼쪽 종아리에 착 내려앉습니다. 2초쯤 기다리다 찰싹 칩니다. “얘야, 모기 잡았으니 이제 자렴.”


  까만 시골모기는 붉은 핏자국 남기며 숨을 거둡니다. 손바닥과 종아리를 물로 헹굽니다. 내 피를 빨았나 아이들 피를 빨았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잘 먹고 잘 죽었습니다.


.. 그러나 그녀는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 요리를 하다가, 빨래를 하다가, 애를 낳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서둘러 늙고 병들고, 어느 날은 가장 좋아하는 연속극을 놓치고 황망히 소파에 앉아 / 그녀는 TV를 떠나서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  (시청자가 TV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나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 죽는 모습을 거의 못 보며 살았습니다. 동무들은 학교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도 하고, 늙으신 피붙이나 이웃 할매와 할배 죽은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데, 나는 좀처럼 누군가 죽는 모습을 못 보았어요. 국민학교 3학년쯤 이르러 할아버지 돌아가실 적에 비로소 누군가 죽은 모습을 봅니다. 그 뒤 할머니 돌아가신 모습을 보기까지는 열 해쯤 흐릅니다.


  어릴 적부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람은 왜 죽을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늙어서 죽는 길이 빠를는지, 몸이 아파서 죽는 길이 빠를는지, 차에 치이거나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는 길이 빠를는지, 전쟁이 터져서 사는지 죽는지 모르는 채 폭탄으로 한꺼번에 사라져 죽는 길이 빠를는지, 참 알 길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썩 재미없더군요. 나는 이렇게 살아서 하루하루 누리는데, 왜 죽음을 생각해야 하느냐 싶더군요.


  돈이 많대서 죽음을 생각 안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대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기를 바라니 죽음을 생각하고, 살기를 바라니 삶을 생각해요. 돈을 바라기에 돈을 생각하고, 사랑을 바라기에 사랑을 생각해요. 전쟁과 권력을 바라는 이들은 언젠가 권력 휘둘러 전쟁을 터트려 한몫 단단히 잡을 생각을 할 테지요.


  죽는 사람은 흙으로 갈까요. 죽는 사람은 하늘로 갈까요. 죽는 사람은 가뭇없이 사라지는 넋이 될까요. 가끔, 내 몸 아닌 다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생각하곤 합니다. 몸은 여기에 둔 채 구름에서 마을 두루 내려본다든지, 아이들 눈높이에서 내 몸을 바라본다든지 합니다. 내 몸을 나 스스로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몸이 몸을 움직일까요, 마음이 마음을 움직일까요, 몸과 마음이 서로 어우러져 내가 살아가며 움직일까요.


  덥다고 생각하니까 덥고, 춥다고 생각하기에 추우며, 슬프다고 생각하는 만큼 슬프다고 느낍니다. 몸이 느끼고 마음이 알며 생각으로 잇습니다. 모든 삶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와 샛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닐 때면, 시골마을 감도는 바람을 맛보면서 자전거와 아이들 무게를 이끄는 엄청난 땀방울 똑똑 흘리면서 ‘살아가는 빛’이 무언가 하고 느낍니다.


  살아가는 빛이란, 시원한 바람이라고 할까요. 살아가는 넋이란, 맑은 물이라고 할까요. 살아가는 꿈이란, 사랑스러운 웃음이라고 할까요. 살아가는 일이란, 아이와 어른이 어깨동무하며 즐기는 놀이라고 할까요.


..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죽은 아버지 부르는 소리 / 얘야, 오늘은 마을에 제사가 있구나 ..  (소년 가장)


  최금진 님 시집 《새들의 역사》(창비,2007)를 대청마루에 드러누워서 읽다가, 마당 평상에 엎드려서 읽습니다. 최금진 님은 싯말로 가난을 노래하거나 죽음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가난을 노래하는군요. 그러면, 가난이란 무엇일까요. 재미없거나 싫거나 나쁜 것일까요. 죽음을 밝히는군요.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못마땅하거나 두렵거나 못된 것일까요.


..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피우고 싶은 것도 그 때문 ..  (악의 꽃)


  아이들이 꺾은 꽃 한 송이는 죽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자른 나뭇가지도 죽지 않습니다. 다른 숨결이 될 뿐입니다. 다른 넋으로 달라질 뿐입니다.


  살아가는 몸은 늘 살아가는 목숨을 밥으로 삼아 먹습니다. 새우를 펄펄 끓여서 먹더라도 죽은 목숨 아닌 산 목숨입니다. 배추나 무를 뽑아서 냉장고에 넣고는 조금씩 썰어서 먹더라도 죽은 목숨 아닌 산 목숨입니다.


  산 목숨이 내 몸으로 깃들어 내 목숨을 이어요. 싱그러이 산 바람을 마시고, 싱싱하게 맑은 물을 들이켭니다. 푸르게 빛나는 바람을 마시고, 졸졸 흐르는 냇물을 들이켭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을 살찌우는 노릇이 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쌀밥을 먹어 몸을 살찌운다면,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책을 읽어 마음을 살찌우는 셈인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마, 그럴 테지요. 그러면, 최금진 님 시집은 누구보다 최금진 님 이녁한테 어떤 마음밥이 될 싯말이 되려나요. 즐겁게 노래하는 삶일까요. 기쁘게 꿈꾸는 사랑일까요. 재미나게 어울리는 놀이일까요. 씩씩하게 붙잡는 일일까요.


  가난한 살림을 노래하건 넉넉한 살림을 노래하건, 모두 노래입니다. 죽은 넋을 밝히건 산 넋을 밝히건, 모두 빛입니다.


  우리 마을 개구리들은 마을 할배들 끝없이 뿌려대는 농약에 모조리 죽습니다. 이웃마을까지 아울러 농약 안 치는 집은 꼭 우리 집뿐입니다. 우리 집 마당 안쪽으로 깃들면 개구리도 메뚜기도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잠자리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제비와 해오라기는 농약 때문에 해롱거리는 작은 목숨 잘못 잡아먹다가는 그만 골로 갈 수 있어요. 참말 요즈막 우리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멧새 한 마리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온통 농약바람이요 농약물결이거든요.


  사람은 이렇게 농약을 들에 옴팡지게 뿌리면서 쌀을 거두어야 밥을 먹을 수 있나요. 사람은 이렇게 들과 숲과 내를 온통 농약으로 물들이면서 고속도로를 내고 자가용을 달려야 돈을 벌 수 있나요.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명과 문화와 정치에는 삶이란 없이 죽음만 있는지 몰라요. 오늘날 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그예 삶하고 등진 채 죽음하고 가까운지 몰라요.


  자전거에 삽자루 끼고 들일 가는 할배 있지만, 자전거 천천히 몰아 굴 캐러 가는 할매 있지만, 모두들 아주 쉽게 농약을 칩니다. 이녁 잡수실 밭에도, 도시로 간 아이들한테 보낼 논에도, 도시사람한테 내다팔 논밭 모두에도, 그예 농약바람입니다.


  농약만 생각하니 농약농사로 나아갑니다. 풀과 숲과 사랑을 생각하면 새로운 흙일과 풀밭과 집숲으로 나아갑니다. 사람한테서 사랑을 받는 감나무가 감알 곱게 맺어요. 사람한테서 사랑을 못 받는 감나무는 감알 제대로 못 맺어요. 사람들이 들들 볶으며 굵다란 열매 맺으라고 하면 감나무는 오래 못 살고 말라죽어요. 들볶는 사람 사라진 빈집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감나무는 홀가분한 마음에 멧짐승과 멧새 먹으라며 감알 소담스레 달아요.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삶이고 사랑하는 대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최금진 님은 스스로 무엇을 이루고 싶어 시를 쓰나 궁금합니다. 최금진 님은 스스로 어떤 길을 걸어가면서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어 시를 노래하는지 궁금합니다. 4346.7.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