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바위 시작시인선 94
이은봉 지음 / 천년의시작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시와 수다
[시를 말하는 시 19] 이은봉, 《책바위》

 


- 책이름 : 책바위
- 글 : 이은봉
- 펴낸곳 : 천년의시작 (2008.2.25.)
- 책값 : 7000원

 


  큰아이가 조잘조잘 이야기합니다. 동생을 곁에 앉히고는 이 얘기 저 얘기 끝없이 잇습니다.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보면서 제 깜냥껏 생각한 얘기, 만화영화에서 들은 얘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 할머니나 이모한테서 들은 얘기 들을 골고루 섞으며 동생한테 이야기를 새로 풀어놓습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는 한편, 누나가 들려주는 얘기를 참 자주 많이 듣습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말을 배우는 한편, 누나한테서도 말을 배웁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큰아이를 돌보면서 가르칩니다. 큰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랍니다. 큰아이는 어머니 말과 아버지 삶을 찬찬히 물려받습니다. 작은아이도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받아먹지요. 그런데, 작은아이한테는 큰아이, 곧 누나가 있어요. 작은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에다가 누나(큰아이) 사랑까지 받습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 말과 어머니 삶을 받아먹는 한편, 누나가 나누어 주는 말과 삶을 나란히 받아요.


.. 바위는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다 ..  (책바위)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았습니다. 여기에 우리 형 사랑을 함께 받았습니다. 내가 쓰는 말은 내 어머니 말이자 내 아버지 말이고 우리 형 말입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 말이란,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쓴 말이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 말이란, 또 이분들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쓰던 말이지요.


  이야기가 흘러 삶이 됩니다. 이야기가 모여 사랑이 됩니다. 이야기가 쌓여 꿈이 됩니다.


  내가 배운 말은 내 어버이가 누리던 삶을 담은 말입니다. 내가 물려받은 말은 내 어버이가 일군 사랑을 실은 말입니다. 내가 쓰는 말은 내 어버이가 차근차근 갈고닦아 품에 안은 꿈을 이루는 말입니다.


.. 옛날 짚신은 온종일 걸었다 ..  (바퀴 달린 구두)


  이은봉 님 시집 《책바위》(천년의시작,2008)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은봉 님은 바위 하나 바라보면서 책을 떠올립니다. 바위 하나에 아로새긴 삶을 돌아봅니다. 바위 하나 살아낸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바위를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으면, 구름을 올려다보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위를 마주하며 책을 읽는 몸가짐이면, 풀포기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어요. 바위를 곁에 두며 책을 읽을 때에는, 아이 눈빛 들여다보며 책을 읽습니다.


  어느 학자가 바위 하나 샅샅이 파헤쳐서 책을 펴내야 ‘바위책’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이야기꾼이 바위와 얽힌 옛이야기 캐내어 소설이나 동화를 써내야 ‘바위 이야기책’이 되지 않습니다.


  바위 곁에서 노는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서 어른이 되어, 지난날 삶을 되짚으면 얼마든지 ‘바위책’이 됩니다. 바위를 바라보며 살던 사람들이 바위를 바라보던 넋을 곰곰이 돌아보면, 언제나 ‘바위 이야기책’을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 돈은 처음 자신을 배춧잎으로 알았다 / 시장통의 사람들이 걸핏하면 저를 배춧잎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돈은 저를 배춧잎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았다 / 평생을 고향집 텃밭에 앉아 / 싱싱한 배춧잎으로 너풀거리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마냥 가슴 벅찼다 ..  (돈은 처음 자신을 배춧잎으로 알았다)


  시 하나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시인이나 평론가나 전문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쓸 수 있는 시가 아니기에 대단하지 않습니다.


  시 하나는 대단합니다. 흙을 만지는 시골사람 누구라도 쓸 수 있기에 시 하나는 대단합니다. 호미를 쥐고 낫을 쥐며 망치나 끌이나 대패나 톱을 쥐는 사람 누구라도 쓸 수 있으니 시 하나는 대단합니다. 시내버스나 택시나 짐차 운전대를 붙잡는 사람도 쓸 수 있어 시 하나는 대단합니다. 도마나 빨래비누나 걸레나 빗자루나 바늘이나 부엌칼 손에 쥐는 살림꾼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만큼 시 하나는 대단합니다.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라면 쓰는 시입니다. 삶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나누는 시입니다. 어떤 글솜씨나 글재주로는 못 쓰는 시입니다. 이론이나 원칙이나 틀이나 논리로는 못 쓰는 시입니다.


  시는 유행이나 사조 따라 쓰지 않아요. 시는 문학이나 예술이나 문화 같은 껍데기로는 쓰지 않아요. 시는 오직 하루하루 누리는 삶 그대로 쓰지요. 시는 늘 사랑을 빛내고 꿈을 밝힐 때에 씁니다.


.. 선생님은 언제 시를 쓰죠, 어떤 시간에? 따위를 질문을 받을 때가 있지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시인한테 ..  (시와 비누)


  이은봉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책바위》는 이은봉 님한테 어떤 삶 드러내는 이야기꾸러미 될까 궁금합니다. 이은봉 님은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기에 재미나다 싶은 시를 쓰는가요. 이은봉 님은 스스로 보람차며 아름다운 하루 누리기에 보람차며 아름답구나 싶은 시를 쓰는가요. 이은봉 님은 이웃과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즐거움 길어올리기에 이야기꽃 흐드러지는구나 싶은 시를 쓰는가요.


.. 내가 흙이었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해바라기 꽃관)


  어여쁜 이야기도 시요, 조잘조잘 떠드는 수다도 시입니다. 두런두런 차분하면서 고즈넉한 이야기도 시요, 시끌벅적 왁자지껄 어수선한 북새통도 시입니다. 꾸밈없이 삶을 빛내도 시요, 꾸미는 겉치레도 시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이렇게 꾸미고 저렇게 치레해야 시라 느낄 노릇일 테고, 누군가한테는 술술 흘러나오는 모든 말마디가 시라 느낄 일입니다.


  이은봉 님이 바위 하나 마주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줄 조금 더 깊이 깨달아, 다른 사람 눈길이나 손길 아닌 바로 이은봉 님 눈길이나 손길로 바위를 사랑스레 보듬는다면, 더없이 고우며 환한 싯노래 일구리라 느낍니다. 가벼운 수다라 해서 나쁠 일 없습니다만, 또 가벼운 수다로도 얼마든지 시밭 일굴 수 있습니다만, 배추와 상추만 밭에서 거두어 먹는 삶 아니랍니다. 꼭 밭자락에 씨를 뿌려서 거두어야만 맛난 푸성귀 얻지 않아요. 사람들 스스로 씨를 안 뿌려도 냉이를 얻고 꽃다지를 얻어요. 사람들이 뿌리지 않은 씨가 스스로 퍼지고 자라면서 민들레 돋고 꽃마리 돋으며 쑥 돋지요. 사람이 애써 심어서 거둔 푸성귀는 ‘약초’로 못 쓰지만, 풀 스스로 번지며 자라는 들풀은 모두 ‘약초’로 써요.


  시는 늘 마음속에 있어요. 시는 언제나 스스로 자라요. 내 마음밭에서 시밭을 느껴 내 마음씨앗이 사랑씨앗 되도록 북돋우면, 시맛 한결 싱그러이 거듭나리라 생각합니다. 4346.4.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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