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말하기
어느 책 하나 이야기를 쓰려고 여러 날 생각에 잠긴다. 어느 책 하나 얼마나 제대로 읽힐 수 있을까 하고 헤아리면서, 이 책을 읽은 내 느낌을 갈무리하기 앞서, 곰곰이 생각을 다스린다. 다른 사람들이 이 책 하나에 나온 사람을 놓고 말밥을 내놓거나 말다툼을 벌이거나 말잔치 벌이는 일은 대수롭지 않다. 그나저나 참 말밥이 많다. 문득 생각한다. 어느 한 사람을 놓고 말밥 내놓는 사람은 무슨 마음일까? 말밥을 내놓는 그 사람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나 사랑이 있을까? 고작 책 몇 권 읽었대서 어느 한 사람을 ‘잘 안다’고 밝힐 수 있을까? 스스로 어느 한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듣는다든지, 또는 스스로 어느 한 사람 곁에서 얼마쯤 함께 살아가며 지켜보고 나서, 차근차근 어느 한 사람 말밥을 내놓는가?
볍씨 한 톨을 생각해 본다. 코끼리 만지기는 재미없다. 나는 볍씨 한 톨을 생각하고 싶다. 누군가는 볍씨 한 톨만 보고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겨를 깎은 하얀 알맹이를 보고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모판에 빽빽하게 심어 조금 자란 푸른 싹을 보고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무논에 옮겨심은 볏모를 보고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모심개(이앙기)에 실은 모판을 보고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여름날 들판 바라보며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가을날 누렇게 익은 논자락 바라보며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마트에 놓인 쌀푸대를 보고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르며, 누군가는 가시내(어머니나 할머니나 옆지기)가 차려서 내놓는 밥상을 받으며 ‘벼’나 ‘쌀’을 말할는지 모른다.
자, 어떤 모습을 보고 나서야 ‘벼’나 ‘쌀’을 제대로, 슬기롭게, 알맞게, 사랑스럽게, 찬찬히, 똑똑히 이야기를 한다고 밝힐 만할까.
스스로 낫을 쥐어 벼포기 베어 보지 않고서도 ‘벼’나 ‘쌀’을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맨발로 무논에 들어가 모를 심어 보지 않고서도 ‘벼’나 ‘쌀’을 슬기롭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피를 뽑은 적 없으면서도 ‘벼’나 ‘쌀’을 알맞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방아를 찧고 켜를 까부른 일 없으면서도 ‘벼’나 ‘쌀’을 사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흰쌀 누런쌀 보리쌀 찹쌀 멥쌀을 잘 씻고 불려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지어서 식구들 먹을 밥상 차린 적 없으면서도 ‘벼’나 ‘쌀’을 찬찬히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볍씨 갈무리하여 건사한 뒤 이듬해에 기쁘게 심을 씨앗을 얻었구나 하는 따사로운 숨결 느끼지 않고서도 ‘벼’나 ‘쌀’을 똑똑히 말할 수 있을까. 볏짚을 엮어 새끼를 꼰 적 없이도, 볏짚으로 꼰 새끼로 짚신을 삼은 적 없이도, 볏짚으로 꼰 새끼를 더 굵게 이어 지붕 이은 적 없이도, 참말 ‘벼’나 ‘쌀’을 말할 만할까.
나는 박헌영이라 하는 사람과 《박헌영 트라우마》라고 하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나로서는 박헌영이라 하는 사람을 ‘안다’고도 ‘잘 안다’고도 ‘읽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려 한다. 볍씨 한 톨이 내 손바닥에 놓이다가 흙 품에 안겨 한 해를 살아내고는 새로운 볍씨 한 톨로 내 손바닥에 놓이는 결과 삶을 돌아보면서 글을 쓰려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말하는 일이란, 얼마나 따사로우면서 애틋한 사랑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4346.4.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