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뱅클럽
그레그 마리노비치, 주앙 실바 지음, 김성민 옮김 / 월간사진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책 <뱅뱅클럽> 느낌글 2부입니다. 이 글은 느낌글 2부이니 앞서 올린 1부를 먼저 읽고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지로 100장 가까이 되는 글입니다. 차근차근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사진에 깃든 사랑을 잘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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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54


― 뱅뱅클럽
 그레그 마리노비치·주앙 실바 글,김성민 옮김
 월간사진 펴냄,2013.3.11./17000원

 


  ㄷ. 케빈 카터, 바라보는 눈길


  젊은 사진가 케빈 카터 님은 1960년 9월 13일에 태어나 1994년 7월 28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으며 사진가로서는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섰다 할 만하지만, 퓰리처상 받은 사진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요.


  지구별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은 다른 사진가 로버트 카파 님은 1913년에 태어나 1954년에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고 죽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던 또 다른 사진가 사와다 교이치 님은 1936년에 태어나 1970년에 베트남에서 총알에 맞아 죽습니다.


  전쟁터 사진을 찍는 이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슬프게 죽지는 않습니다. 죽은 사람보다 살아남은 사람이 더 많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다른 사진길을 꾸준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이 몸을 사렸기에 살아남고, 몸을 안 사렸기에 살아남지 못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는 군인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아요. 총알이 빗발치고 지뢰가 터지며 탱크와 전투기가 폭탄과 미사일 퍼붓는 곳에서는 목숨줄이 따로 없습니다. 한쪽은 삶이라면 한쪽은 죽음입니다. 한쪽은 빛이라면 한쪽은 어둠입니다. 늘 두 가지가 함께 움직입니다.


  케빈 카터 님이나 로버트 카파 님이나 사와다 교이치 님이 죽음길 아닌 삶길을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면, 앞으로 어떤 사진을 우리한테 베풀 수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이들은 목숨을 내려놓거나 빼앗겨야 했을까요. 아니, 이들 목숨이 아스라이 사라지기 앞서, 이 지구별에서 전쟁과 다툼과 학살과 굶주림이 먼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들 사진을 말하기 앞서, 이들이 사진으로 말하려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이 사진으로 말하려던 이야기에 나오듯, 지구별에 아름다움과 평화와 사랑이 감돌도록 우리들이 온힘 기울일 노릇 아닐까요.


.. 젊은 사진가인 케빈 카터는 80년대 중반에 신문사에서 처음 일할 때 알게 된 사이다. 이때, 케빈은 공개처형이라고 알려진 네클리스를 처음 목격하게 된다. 네클리스는 휘발유로 채워진 타이어를 목에 걸게 하고, 불을 붙여 살해하는 야만적인 처형 방법을 지칭하는 이 지역 속어다. 케빈은 마키 스코사나의 네클리스 처형을 목격하고, 사진을 촬영했는데, 처형 이유는 단지 그녀가 경찰관의 애인이었다는 것뿐이었다 … 케빈은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수년 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 놀랐고, 이런 현장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한 번 더 놀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했던 일들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충격적인 현장에서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꼭 형편없는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  (67, 68쪽)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으려 애쓰는 이들은 언제나 사진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누리면서, 이웃들과 아름다움을 사랑스레 나눕니다.


  슬픔과 죽음을 사진으로 담으려 힘쓰는 이들은 언제나 사진으로 슬픔과 죽음을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늘 슬픔과 죽음을 생각하고, 삶에서 슬픔과 죽음을 스스로 겪거나 부대끼는 한편, 이웃들한테 슬픔과 죽음을 퍼뜨립니다. 그래, 가까운 이웃이나 동무한테 슬픔과 죽음을 퍼뜨릴 수 있다고 스스로 느껴, 이웃이나 동무한테 아뭇소리 안 하면서 사진만 찍곤 하지요.


  스스로 외롭습니다. 스스로 혼자 됩니다. 사진은 누구나 혼자 서서 찍지만, 슬픔과 죽음이 벌어지는 곳으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는 이들은 더 외롭고 더 혼자 되어 사진기를 쥡니다.


  인종차별과 전쟁과 굶주림과 학대가 노상 벌어지는 터전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마음에 담을까요. 사진가 아닌 여느 사람이라면 사진으로 찍을 일도 없겠지만, 끔찍한 싸움터에 뛰어들 일조차 없고, 끔찍하게 죽은 사람들 주검을 들여다볼 일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진가를 부릅니다. 이봐, 저기 저 끔찍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알려야 하지 않나, 하고. 사진가는 사람들한테, 이보게, 그게 그렇게 끔찍해서 사진으로 찍어 알려야 한다면 자네가 찍게, 하고 대꾸하지 못합니다. 사진가는 사람들한테, 그렇군요, 그렇게 끔찍한 모습이니 제가 들여다보고 사진으로 알뜰히 담아 널리 알려야겠군요, 하고 대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사람들 스스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사진가는 노상 들여다봅니다. 사람들 스스로 구역질 난다 싶은 끔찍한 죽음을 사진가는 늘 마주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가까이하지 않는 곳으로 사진가는 언제나 뛰어듭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픔과 죽음이 벌어지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그러니까 슬픔도 죽음도 두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슬픔과 죽음 냄새가 진저리쳐지도록 퍼지는 곳하고는 멀리 떨어진 채, 사진만 봅니다.


.. 백인들만 사는 지역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던 흑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이 빈번하게 출동했고, 어린 케빈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소위 자유주의적 가풍을 가진 우리 가정은 결코 인종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인간을 포함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크리스천 방식으로 양육되었다. 하지만 난 이제 어떻게 나의 부모 세대들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명백한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해 그토록 방관적일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 케빈은 언젠가 한 기사에서 전쟁을 취재하면서 우리가 공유했던 생각들을 피력했다. “나는 내가 보았던 것들로 인해 상심에 쌓이고, 악몽을 경험한다. 내 가족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을 느낀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나는 황량한 먼지 속의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어두운 이미지들을 가진 어두운 곳으로 침잠한다.” ..  (68∼69, 88∼89쪽)

 

 

 

 


  사진가 케빈 카터 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사진으로 찍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사진벗 주앙 실바 님과 함께 수단에 갔습니다. 이 둘은 보름 남짓 기다린 끝에 수단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겨우 탈 수 있었고, 아주 짧은 동안 살짝 지나가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수단으로 보내어 사진을 찍도록 일을 시킨 단체는 ‘이 두 사람이 굶주린 사람들을 사진으로 잘 담아서 유럽과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에서 수단으로 구호 물자와 구호 돈을 많이 보내도록 해 주기’를 바랐어요.


  사진가 두 사람은 ‘지구별 이웃들이 굶주린 수단 모습에 눈을 번쩍 뜨도록 이끌’ 만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여러 날이나 여러 주 머물 수 없었습니다. 더 오래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바쁘게 마을을 훑어야 했고, 달리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바라보며 ‘더 슬프고 훨씬 괴롭게 보이는 모습’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손으로 도울 수도 없고, 주머니에서 돈 몇 닢 꺼내어 내밀 수도 없으며, 말 한 마디로도 따순 이야기 건넬 수도 없었습니다.


  주앙 실바 님은 그럭저럭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그야말로 사람들 눈을 번쩍 뜨도록 이끌 만한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 두 사람은 ‘사진가로서 제대로 일을 했느냐 못했느냐’를 헤아립니다.


.. 눈물은 케빈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그가 촬영했던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상징했다 … 주앙은 닭냄새가 진동하는 방에서 더러운 마루 위에 사지를 쫙 벌리고 누워 있는 깡마른 어린아이를 보았다. 케빈도 와서 함께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앙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의 온갖 행복한 기대감은 사라지고, 전쟁이 낳은 기아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 주앙이 방금 촬영했던 아이 같았지만 근처에 콘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방금 콘도르를 쫓아냈어!” 케빈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너무 빨리 말하느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초록색 스카프로 눈을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  (169, 170, 173쪽)


  사진가 두 사람을 수단으로 보낸 구호단체 사람들은 사진가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구호단체가 더 널리 알려질 만한 사진을, 지구별 곳곳에서 당신들한테 구호품과 돈을 많이 보내 주도록 이끌 만한 사진을 얻었거든요. 구호단체 사람들은 케빈 카터 님 사진을 바라보면서 ‘사진에 나온 가시내가 그 뒤 어떻게 되었느냐’ 하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에 나온 가시내’는 바로 구호단체 사람들이 건사하며 보듬을 아이입니다. 사진가더러 ‘그 아이 도우라’는 뜻으로 구호단체에서 두 사람을 불러들이지 않았어요. 구호단체는 사진가 두 사람더러 ‘사진을 찍으라’고 수단까지 불렀어요. 사진가 두 사람은 스스로 경비를 마련해서 수단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구호단체는 사진가 두 사람한테 경비를 대주지 못해요. 구호단체는 사진가 두 사람이 사진을 더 잘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뿐입니다. 사진가 두 사람은 구호단체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수단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얼마나 고단하고 굶주리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케빈 카터 님 사진을 받은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구호단체한테 ‘사진에 나온 가시내’ 뒷이야기를 묻지 않고, 사진 찍은 사람한테 뒷이야기를 묻습니다. 너무 마땅하지만, 사진 찍은 사람이 뒷이야기를 알 턱 없습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헛다리를 짚으며 사진가를 나무랍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수단에 있는 구호단체에 전화를 먼저 걸어 ‘사진에 나온 가시내’ 뒷이야기를 여쭈어야 했습니다. 전화를 걸어 알 수 없다면, ‘뉴욕타임즈 기자’ 한 사람을 수단으로 보내어, 그 아이 뒷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해야 했습니다. 또는, 케빈 카터 님한테 경비를 모두 대주면서 수단으로 보내 주어, ‘사진에 나온 가시내’가 그 뒤에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으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뉴욕타임즈에서 그 사진을 널리 팔아 잡지를 알리고 돈을 벌었다’면, 다른 기자보다 케빈 카터 님을 수단으로 보냈어야 올바릅니다. 이번에는 케빈 카터 님이 오래도록 수단에 머물 수 있게끔 해 주어야 했습니다.


  케빈 카터 님이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사진을 찍을 적에는,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느라 며칠 머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무렵 케빈 카터 님은 생활비조차 없던 형편이었어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는 사진가 한 사람한테 여섯 달 동안 취재를 하도록 일을 맡깁니다. 뉴욕타임즈 잡지도 케빈 카터 님한테 여섯 달 즈음 수단에 머물면서 ‘굶주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한결 깊이 파고들도록 일을 맡겼어야 올바릅니다.


  그러나,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모든 일을 그르칩니다. 가장 나쁜 쪽으로 일을 꾀합니다. 사진 한 장 헐값에 사들여서 쓰면서, 사진가를 비판하는 차가운 한 마디를 달아 매체에 사진을 싣습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케빈 카터 님 사진에 “사진가는 콘도르를 쫓아낸 후에 그녀가 기력을 회복해 다시 급식소로 갔다고 했다. 아이가 급식소에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는 알지 못한다(177쪽).” 하고 적바림합니다.


.. 사진이 출간되고 난 뒤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던 일을 낸시 리는 회상한다. 모두들 이 소녀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했다. 그래서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인) 그녀는 케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다. 그는 그 아이가 식량 배급소로 갔다고 말했다. “그녀(아이)를 도왔나요?”, “아뇨, 아이는 일어나서 급식소로 갔어요. 우린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내가 볼 수 있었다구요.”, “그럼,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네요. 아이를 돕지 않았군요?”, “아뇨. 하지만 아이가 간 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보았다구요.” ..  (175∼176쪽)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사진부장’이자 ‘잡지 편집자’로서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이가 급식소에 안전하게 갔는지’를 알아보는 몫은 사진가 아닌 잡지 편집자한테 있어요. 스스로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잡지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제대로 알아보고서 잡지를 내놓았어도 되고, 뒷이야기는 더 취재해서 싣겠다고 붙였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케빈 카터 님 사진은 케빈 카터 님만 찍었어요. 다른 어느 누구도 찍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 가지를 또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뒷이야기보다 다른 대목을 더 궁금하게 여겼고, 다른 대목을 갈무리하는 데에 훨씬 힘을 기울였습니다. “낸시 리는 자신이 콘도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여전히 사진을 한 장씩 뽑아낼 수 있는 구식 전송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진을 본 그녀는 부이르스키에게 〈뉴욕타임즈〉에서 이 사진을 출판하기 전까지 케빈이 다른 어떤 출판물에도 이 사진을 팔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175쪽).”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이녁이 몸담은 사진잡지 잇속 때문에 젊은 사진가 한 사람을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런데, 일을 여기에서 뚝 그쳤으면 케빈 카터 님이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사진 하나 때문에 시달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케빈 카터 님은 젊고, 앞으로 수많은 사진을 찍을 사람이며, 참말 수없이 놀라운 다른 사진을 꾸준하게 찍는 사람이거든요.


  안타깝지만, 뉴욕타임즈는 두 번째 일을 저지릅니다. 바로, 이 사진을 퓰리처상 후보로 올려, 퓰리처상을 받게 합니다. “〈뉴욕타임즈〉의 사진 편집장은 케빈의 콘도르 사진을 퓰리처상에 제출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케빈은 그전에 한 번도 그들과 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단 한 번 사진을 구입해 게재한 외부의 프리랜서보다는 내부 스태프 사진기자들의 사진을 제출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퓰리처는 저널리즘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 아니던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문인 〈뉴욕타임즈〉는 기사로는 수 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한 적이 있지만, 사진으로는 한 번도 이 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추천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결국 케빈의 사진을 선택했다. 자신들이 그해에 출간한 사진들 가운데 케빈의 사진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이미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210쪽).”


  케빈 카터 님은 ‘퓰리처상’이 있는지 없는지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아마 ‘뉴욕타임즈’라는 신문이 있는지 없는지 이름조차 몰랐으리라 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과 내전과 학살을 사진으로 찍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매체에 사진을 싣고, 더러 AP 같은 데에 사진을 팔 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미국에서 케빈 카터 님 사진을 한 장 사서 어느 매체에 실었다 한들, 그 뒤에 어떤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뉴욕타임즈가 매체에 사진 한 번 싣고 끝냈으면 그야말로 모든 일은 끝이었어요. 그러나 퓰리처상을 받게 하고, 퓰리처상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사진 한 장에 매기는 윤리와 도덕 잣대로 손가락질하는 모든 비판’을 뉴욕타임즈 아닌 케빈 카터가 받도록 했어요.


.. 사진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원조단체들에서 기금 모금을 위해 이 사진을 포스터에 사용했다. 또한 전 세계의 수많은 신문들과 잡지들도 이 사진을 게재했고, 독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내왔다. 수단에 있는 많은 원조 기구들에 후원금이 답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 정작 케빈은 도덕적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사진을 촬영하고 난 뒤에 아이를 들어서 100미터 거리밖에 안 되는 급식소에 데려다 주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수단의 어려운 사정을 세상에 알리는 기자로서의 사명은 완수되었고, 그 이상의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라이프라인 수단이라는 단체가 케빈과 주앙을 수단에 데리고 간 이유가 아이들을 보살피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역할은 최악의 기아와 전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213, 214쪽)


  왜 뉴욕타임즈 사진부장과 편집자 들은 퓰리처상 받은 다음에라도 케빈 카터 님을 수단으로 보내어 뒷이야기를 사진으로 담도록 일을 안 맡겼을까요? 왜 비평가들은 이 대목을 못 짚거나 안 짚을까요? 왜 사람들은 사진가 한 사람한테 모든 화살을 퍼부을까요?

 


  케빈 카터 님이 아니었어도 ‘굶주리는 수단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을 사람은 많았겠지요. 케빈 카터 님이 아니어도 ‘굶주리는 수단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알린 사람은 많겠지요.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케빈 카터 님처럼 사람들 가슴을 찡하게 울리면서 움직이지 못했어요.


  도덕이니 윤리이니 하고 따지기 앞서, 아니 도덕이나 윤리를 따질 때조차도, 케빈 카터 님 사진처럼 사람들 가슴을 울리거나 아프게 하지 못했어요. 도덕이나 윤리를 따지려 한다면, 먼저 사진 한 장이 가슴을 울리거나 아프게 해야 합니다. 가슴을 울리거나 아프게 하는 사진이기에, 사람들은 이 사진 한 장을 놓고 도덕이나 윤리를 따질 수 있습니다.

 

 

 


.. 라디오에서 총격 소식을 듣고 케빈이 토고자로 돌아왔다. 응급실 입구 밖에서 개리가 케빈의 목을 껴안고 켄이 죽었다고 토해내듯이 말했다. 케빈은 곧장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방금 죽은 것이다 … 켄의 죽음은 케빈과 주앙에게 커다란 상처를 가져왔고, 이들은 이날 취하기로 작정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술은 고통을 잠재우는 대신에 주앙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 주앙은 죄책감에 빠졌고, 마음이 상했다. “어떻게 죽은 친구를 촬영할 수 있었지? 진정으로 내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는 케빈의 팔에 안겨 울었다. 케빈은 그를 꼭 안고서 말했다. “적어도 너는 그곳에 있었잖아.” … 단 2주 사이에 그(케빈)는 음주운전으로 체포되고,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직장을 잃었다가, 퓰리처상을 받아 다시 일을 되찾았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 그러나 케빈은 일거리 이상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총알에 맞았어야 하는 사람은 켄이 아니라 바로 나였어야 했어.’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을 들었다 ..  (234, 244, 245∼246, 249쪽)


  케빈 카터 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랑하던 짝꿍이랑 낳은 딸아이조차 거의 만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 케빈 카터 님은 언제나 죽음과 슬픔 수렁에서 괴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사진을 찍느라, 이 죽음과 슬픔 수렁 이야기를 ‘가까운 살붙이’한테조차 들려주지 못합니다. 온몸 갈기갈기 찢겨 죽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하는 이야기를 저녁밥 먹는 자리에서 꺼내면, 아마 다들 밥맛이 사라지겠지요. 식구들이 케빈 카터 님더러 ‘오늘 무슨 사진 찍었어요?’ 하고 묻는 일이 없겠지요. 너무도 뻔한 대답과 너무도 끔찍하고 슬픈 대답을 할 일이 뻔하니, 아예 안 묻겠지요.


  케빈 카터 님은 스스로 마음에 담기 버거운 짐을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채 열 몇 해째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동안 사랑하던 짝꿍한테서 버림받고, 딸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법에 걸리고, 당신은 언제나처럼 죽음과 슬픔 수렁이라는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나날이라 하더라도, 케빈 카터 님은 그동안 목숨을 안 끊고 버티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뱅뱅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진벗이 있었어요. 이 뱅뱅클럽 사진벗 가운데 케빈 카터 님은 켄 오스터브룩이라는 사진벗을 친형처럼 삼아 마음앓이를 나누며 새로 기운을 북돋았다고 해요.


  그런데 바로 켄 오스터브룩 님이 ‘평화유지군이 쏜 총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다른 사진벗 하나도 ‘평화유지군이 쏜 총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았’는데 아주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집니다.


.. 뉴욕 여행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케빈에게 사진을 촬영했을 때의 감정과 행동에 대해 신랄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텔레비전 방송 스태프는 내내 케빈을 쫓아다녔고, 기자들로 인해 케빈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 케빈의 윤리와 그의 인간애에 관한 질문들이 빈번하게 제기되면서 케빈의 압박도 쌓여 갔다 … 케빈은 카메라를 들 때마다 콘도르 사진 수준의 작품을 찍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고, 사진가의 상투성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콘도르 사진을 가리켜 많은 사진가들이 요행수로 얻어낸 ‘앵무새’ 사진이라고 헐뜯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사진에는 운이 따랐다. 그러나 케빈은 그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수단에 갔고, 촬영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와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 … 그가 과거에 했던 모든 일들이 이 사진 한 장으로 싹 지워져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퓰리처상과 함께 그에게 쏟아진 많은 기대들이 케빈으로 하여금 사진을 촬영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마비 상태였다 ..  (261, 265, 267쪽)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녁 삶에 따라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 삶에 따라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녁 사랑을 밑거름 삼아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 사랑을 발판 삼아 사진을 찍습니다.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삶자리에서 어떤 사랑으로 사진을 읽을까요. 케빈 카터 님은 어떤 삶자리에서 어떤 사랑으로 사진을 찍었을까요.


  케빈 카터 님이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았다면, 당신 삶자리가 스산하게 무너지고 당신 사랑이 가뭇없이 지워졌다는 뜻 아닐는지요. 당신한테 사진을 찍는 힘이 되는 삶자리가 와르르 무너진데다가, 당신으로서 사진을 붙잡는 밑바탕이 될 사랑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말았다는 뜻 아닐는지요.

 

 

 


.. 그 이후 누구도 살아 있는 케빈을 다시 보지 못했다 … 주앙은 자신이 아직 꿈을 꾸는지 전화기를 흔들어댔다 … 고향에 돌아와서 우리는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에게 모두 얘기하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의 유서조차도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못했다. 두서없이 적힌 유서는 후회와 분노,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33살의 나이에 마침내 자신의 실패에 대한 자각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난 언제나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었지만, 나란 놈은 그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말았다.” … 케빈이 자살하던 날 아침에는 케빈의 수단 사진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적어서 보낸 일본 학생들의 편지다발이 그의 부모 집에 도착했다. 편지는 도쿄의 아라카와구에 있는 다이로꾸 니폰 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낸 것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편지의 일부가 낭독되었다. “제가 만약 이런 험악한 상황에 처한다면, 난 당신의 사진을 기억하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저는 이제까지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이 사진을 본 이후로 저는 어떤 것이든지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난 사진을 찍지 않고, 이 소녀에게 물을 가져다주었을 거예요.” “난 떨리는 손으로 한 장의 사진을 찍었을 거예요.” ..  (277, 278, 279, 280, 281쪽)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은 아이들 가운데 사진가 길 걷는 아이가 있습니다.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은 아이들 가운데 스스로 기운을 차려 씩씩하게 삶 일구는 아이가 있습니다.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은 아이들 가운데 이웃사랑에 눈을 뜬 아이가 있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왜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사진을 찍었을까요.


  이야기책 《뱅뱅클럽》을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 새근새근 재운 깊은 밤에 조용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어느덧 새벽동이 천천히 틉니다. 창호종이 바른 문살로 새벽빛살 살며시 스밉니다. 처마 밑 제비집에서 잠을 깨고 일어날 제비들이 곧 째째째째 노래하며 먹이 찾으러 들마실 갈 때입니다. 나는 밤새 아이들 잠자리 이불을 열 차례나 스무 차례 여밉니다. 아이들은 자는 동안 자꾸자꾸 이불을 걷어찹니다. 아이들과 살아오는 내내 어느 하루도 깊이 잠든 적 없습니다. 아이들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오줌기저귀 갈랴 밤잠 못 이루고, 아이들 제법 큰 뒤로는 밤새 이불깃 여미느라 밤잠 못 이룹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씩씩하게 새로 맞이하며 살아가는 힘이라면, 바로 아이들입니다. 달콤하게 자면서 꿈나라 누비는 아이들 맑은 얼굴 바라보며 기운을 차립니다.


  케빈 카터 님은 수단에서,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당신 곁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 맑은 얼굴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굶주리는 아이들이건, 어른들 싸움터에서 애꿎게 총알에 맞거나 폭탄에 맞은 아이들이건, 한결같이 티없는 얼굴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아이들 얼굴 떠올리면서, 이 아이들 모두 평화롭고 사랑스레 누릴 지구별을 꿈꾸며 사진 한 장 찍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쟁을 멈추고, 돈놀이를 멈추며, 서로 어깨동무하는 품앗이와 두레를 바라는 이야기 한 자락 사진에 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에 나란히 찍힌 콘도르’는 가녀린 가시내를 노려보려고 그 자리에 찾아들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바로 우리들을 지켜보려고 그 자리로 찾아들었으리라 느껴요. 가녀린 가시내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콘도르 아닌, 우리들 스스로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 북돋우도록 힘쓸 때까지 기다리는 콘도르라고 느껴요.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생각해요. 자, 우리는 사진 한 장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자, 우리는 사진 한 장을 읽고 우리 삶을 어떻게 일구며 보살펴야 할까요. 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어떤 손길로 마주하며 어떤 마음길로 사랑해야 할까요. 4346.4.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느낌글 2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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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0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소중한 책과 소중한 느낌글 1, 2부 차분한 마음으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릇 다 그렇겠지만 사진은 삶의 이야기겠지요.
우리가 어떤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저도 함께살기님의 글과 사진 읽으며, 나날이 참삶의 기쁨에 젖어들어 즐거운 삶 기꺼이 누릴 수 있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3-04-03 10:56   좋아요 0 | URL
두 번째 느낌글 맨 위에 올린 사진이 바로 '총격전 벌어지는 곳에서 사진 찍는 케빈 카터' 님 모습이에요. 옆에 숨은 흑인 얼굴빛에 감도는 두려움, 또 그 옆에서 앞에 자기를 지켜 줄 엄폐물 없이 사진기 들고 사진 찍는 케빈 카터 얼굴에서 드러나는 '죽고 죽이는 모습 찍는 어지러움과 슬픔 뒤섞인 넋 나간 빛'... 이것이 바로 분쟁지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저 얼굴빛이 고작 서른 안팎 나이에 찍힌 모습이에요...

사진뿐 아니라 글도 모두 저마다 꾸리는 삶빛이 고스란히 드러나는구나 싶어요. 저도 appletreeje 님이 띄워 주는 싯노래 읽으며 마음을 새롭게 다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