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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 이문재 시집
이문재 / 문학동네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놀면서 빛나는 하루
[시를 노래하는 시 47] 이문재, 《마음의 오지》
- 책이름 : 마음의 오지
- 글 : 이문재
- 펴낸곳 : 문학동네 (1999.1.30.)
- 책값 : 8000원
달빛 밝은 밤, 그림자가 짙게 드리웁니다. 큰아이는 왼손으로 잡고 작은아이는 오른손으로 잡으며 시골 밤길 천천히 걷습니다. 하루 내내 실컷 놀았으니 이제 잠들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달빛을 바라봅니다. 설이나 한가위나 큰보름이 아니어도, 보름달 되면 달빛 아주 밝으며 곱습니다. 하늘도 밝고 들길도 밝아요. 우리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나 군내버스 혼자 타고다닐 나이쯤 되면, 이런 달밤에 숨바꼭질 놀이를 하겠구나 싶습니다. 나도 어린 날 달밤에 숨바꼭질 놀이를 퍽 즐겼어요. 우리 어머니나 동무들 어머님은 아이들이 저녁 늦게까지 집에도 안 들어오고 논다며 애가 탔을는지 모릅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요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난날 어머니 마음을 느끼는데, 어릴 적 개구지게 뛰놀 적에는 온통 뛰놀 생각으로 바빴어요. 어떻게 하면 더 놀까, 어찌하면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또 밤이고 놀이로 하루를 보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 등불 이리 환한가 /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 (노독)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잘 놀던 작은아이가 저녁 느즈막한 무렵 갑자기 앙앙 하고 웁니다. 아하, 이제서야 몸이 힘들어 재워 달라는 뜻이로구나. 작은아이가 잘 놀다가 갑자기 앙앙 하고 울며 안기려 할 적에는 품에 안기 무섭게 곯아떨어집니다. 곯아떨어진 아이 볼에 입을 맞추든 머리카락 쓸어넘기든 간지럼 태우든 깨어나지 않아요.
잘 논 아이는 잘 잡니다. 잘 놀지 못한 아이는 밤늦도록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어른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느껴요. 스스로 하루를 즐겁게 누린 어른은 즐겁게 잠듭니다. 스스로 하루를 즐겁게 못 누린 어른은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해요.
.. 우리 아버지가 박물관에 들어간 꼴이지요 / 내 아들은 학교에 들어가서 농부였던 할아버지를 농업박물관에서 관람하겠지요 .. (농업박물관 소식)
일이란 놀이라고 느껴요. 놀이란 일이라고 느껴요. 돈을 벌어야 일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돈이 되는 길을 가야 일이라 할 만하지는 않다고 느껴요. 즐겁게 일구는 삶일 때에 일이 된다고 느껴요. 활짝 웃고, 흐드러진 이야기꽃 피울 수 있는 삶자리 찾을 때에 비로소 일이라는 이름이 걸맞다고 느껴요.
아이들 놀이는 어른으로서는 일입니다. 곧, 아이들은 실컷 놀아야 하고, 개구지게 놀아야 해요. 아이들 누구나 개구쟁이나 말괄량이 되어야지요. 아이들 모두 놀이꾼 되고 노래꾼 되며 춤꾼 되어야지요. 아이들이라면 조잘조잘 하루 내내 쉬잖고 이야기꽃 피울 수 있어야지요. 흙도 만지고 돌도 만지며 두 발로 콩콩 땅을 힘차게 구를 수 있어야지요.
방바닥에서도 뒹굴고 흙땅에서도 뒹구는 아이들입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갈아입혀 빨면 돼요. 옷에 구멍이 나면 그냥 입어도 되고, 기워도 돼요. 어른들은 이녁 삶에서 즐거운 웃음 길어올리는 일을 찾을 노릇이요, 아이들은 저마다 즐거운 놀이 나누는 하루를 누릴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 덕수궁 잔등, 재개발 지구, 내부수리한 식당에서 /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가정식? / 비가정식 백반도 있을까, 식당에만 남아 있는 가정식으로 .. (각성제)
아름다운 마음이 될 때에 아름답구나 싶은 말이 태어나요. 사랑스러운 넋이 될 때에 사랑스럽구나 싶은 글을 써요. 하루하루 고단한 일거리하고 부딪힌다면, 말이나 글은 으레 고단한 말이요 고단한 글이 되지요. 언제나 괴롭거나 고달픈 말썽거리를 푸는 일감에 얽매인다면, 말이든 글이든 괴로운 말이나 고달픈 글을 엮을밖에 없어요.
하루를 아름다움으로 누리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말꽃을 피워요. 삶을 사랑으로 보듬는 사람은 사랑을 속삭이는 글꽃을 피워요.
오늘날 문학하는 분들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문학을 하는가 가만히 헤아려 봐요. 오늘날 신문·방송 엮는 기자라는 자리에 서서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분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 만나며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지 생각해 봐요.
오늘날 문학에서 웃음꽃 피우는 글은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신문·방송에서 맑은 사랑과 밝은 꿈 노래하는 글은 얼마나 있나요.
.. 15층 베란다에 겹동백 피어 / 나, 오늘 회사 안 간다― / 벌렁 눕고 싶지만, 고창 선운사로 / 튀고 싶지만 간이 부은 삼십대 후반 / 불쑥 몸 속에서 튀어나와 / 내 멱살을 붙잡는다 .. (겹동백)
글을 쓰려는 사람일수록 조그마한 텃밭 한 뙈기를 일구어야지 싶어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라면 나무밭 몇 평쯤 건사해서 나무 몇 그루 돌보아야지 싶어요.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이라면 들풀과 들꽃 날마다 들여다보며 들나물 뜯어야지 싶어요. 노래를 부르려는 사람이라면 갯벌에서 조개랑 바지락이랑 캐면서 낙지도 잡아 보아야지 싶어요. 춤을 추려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숲에 깃들어 나무내음 맡고 풀내음 마셔야지 싶어요.
스스로 가장 따사로운 넋으로 거듭날 때에 글을 쓸 수 있다고 느껴요. 스스로 가장 너그러운 얼로 다시 태어날 때에 이야기를 빚을 수 있다고 느껴요. 스스로 가장 너른 꿈을 키울 때에 글줄에 빛이 서린다고 느껴요. 스스로 가장 깊은 사랑으로 삶을 보듬을 때에 이야기타래 싱그러이 빛낸다고 느껴요.
.. 지하철 타러 서울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 갇히다가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 / 광고판 옆에서 나란히 불켜고 있는 / 시를 본다 자동문이 닫힌다 두 눈을 꽉 감아버린다 / 누군가 내 머리통을 뽑아내 던져버린다 / 수드라의 수박 한 통이 박살난다 .. (바라문, 바라문)
이문재 님이 일군 시집 《마음의 오지》(문학동네,1999)를 읽습니다. 이문재 님은 스스로 서울이 갑갑하다고 여기면서, 스스로 서울을 떨치지 않습니다. 이문재 님 스스로 서울살이 고달프다 여기지만, 막상 서울을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문재 님 싯말에는 이문재 님 삶과 꿈과 사랑과 믿음이 낱낱이 뱁니다. 이문재 님 싯노래에는 이문재 님 눈물과 웃음과 속삭임과 숨결이 고루 묻어납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하루인가요. 어떤 빛을 받아들여 삶을 일구고 싶은가요. 어느 자리에 서서 이문재 님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싶은가요. 고단한 삶 그대로 이으면서 고단하게 읽어야 하는 고단한 글을 쓰고 싶은가요. 맑은 삶으로 새로 태어나 맑게 읽을 수 있는 맑은 글을 쓰고 싶은가요.
..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 (타워 크레인)
이문재 님 스스로 이문재 님 눈길을 확 틀 만한 아름다운 터에 보금자리 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문재 님이 쓰고픈 시를 쓸 수 있는 터에 이문재 님 삶을 아리땁게 영글 만한 둥지를 엮기를 바랍니다.
끌려다니는 시가 아닌, 이끄는 시를 쓰기를 빌어요. 잡아먹히는 시가 아닌, 구수한 밥상 차려서 내놓는 시를 쓰기를 빌어요.
할 수 있어요. 언제라도 할 수 있어요. 하면 돼요. 언제라도 하면 돼요.
.. 표고 45미터에서 잠자고, 지하철을 한 시간 타고 도심으로 나와서 지상 21층에서 일하다가, 점심 때는 대개 29층 구내식당에서 밥 먹고, 저녁에는 간혹 지하 생맥주집에 들렀다가 곧장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간다 / 그래놓고 보니, 하루에, 내가 땅과 구두밑창이나마 살 문대는 시간은 평균 채 한 시간이 안 된다 .. (그날이 어느 날)
스스로 깨달았으면 스스로 길을 가야 한다고 느껴요. 깨달았다 말은 하지만, 말과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싯말은 열리지 않아요. 스스로 깨어나는 넋에서 스스로 열리는 싯말이에요. 싯말은 보고서나 결재서류가 아니에요. 싯말은 신문기사나 방송새소식이 아니에요. 내 사랑을 담아서 나눌 때에 싯말이지요. 내 꿈을 실어서 펼칠 때에 싯노래이지요.
하루 한 시간 채 안 된다는 ‘땅과 살 문대는 겨를’을 더 깊이 헤아려 보셔요. 그리고, 바로 이 하루 한 시간 채 안 되는 겨를을 가슴 깊숙하게 받아들여 보셔요. 싯말이 춤출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 보셔요. 싯노래로 피어날 수 있게끔 마음을 쏟아 보셔요.
하루 열 시간 흙을 밟아도 즐겁고, 하루 삼십 분 흙을 만져도 즐거워요. 하루 열네 시간 흙밭에서 뒹굴어도 즐거우며, 하루 십 분 흙을 바라보아도 즐거워요.
우리가 바라보며 즐거울 만한 데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웃으며 살아갈 만한 일을 스스로 찾아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면서 빛나는 하루인걸요. 노래하면서 빛나는 하루인데요. 춤추면서 빛나는 하루요, 밥을 차리고 밥을 먹으며 풀꽃 쓰다듬는 동안 시나브로 빛나는 하루예요. 4346.3.2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