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탑사 봄꽃내음
고흥 길타래 6―걸어야 만나는 꽃
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꽃한테 마음을 연 사람입니다. 꽃한테 마음을 열지 못한 사람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을 보더라도 느끼지 못합니다. 꽃은 꽃망울이나 꽃송이나 꽃잎으로만 꽃이지 않습니다. 마음밭을 꽃밭으로 일구는 숨결로 마주할 때에 비로소 꽃입니다.
따사로운 볕살 드리우는 아침나절, 멧길을 거닐며 봄내음 마십니다. 포근한 바람결에는 봄을 맞이해 피어난 꽃마다 내뿜는 꽃가루가 실립니다. 이른바 꽃바람이 붑니다. 꽃바람을 쐬면서 비자나무숲 사이를 거닐면, 곳곳에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는 진달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겨울에도 푸른 잎사귀 짙은 비자나무 사이에서도, 겨울날 잎 모두 떨군 나무들 사이에서도, 진달래는 씩씩하게 새 꽃을 틔웁니다. 분홍빛이라는 낱말로는 가리키기 어려운, 꼭 진달래빛이로구나 하는 한 마디로만 가리킬 수 있는 진달래꽃을 틔웁니다.
금탑절 앞마당에서 자라는 명자나무, 또는 아가씨나무 꽃망울이 터질락 말락 합니다. 명자꽃, 또는 아가씨꽃은 어떤 빛이름으로 가리켜야 할까요. 빨강, 짙은빨강, 주홍, 다홍, …… 명자꽃이나 아가씨꽃 또한 다른 어느 빛이름으로도 가리키지 못합니다. 오직 명자꽃빛이나 아가씨꽃빛이라고 말할 때에 비로소 이 꽃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너른 풀밭에서도 피어나는 제비꽃이지만, 그늘진 구석자리에서도 피어나는 제비꽃입니다. 너른 풀밭에서 피어나는 제비꽃 빛깔은 살짝 옅습니다. 그늘진 구석자리에서 피어나는 제비꽃 빛깔은 한껏 짙습니다. 조그마한 제비꽃 곁에는 더 조그마한 꽃마리가 하얗게 흔들립니다. 이 작은 꽃을 마주하자면 걸어야 합니다. 이 작은 꽃을 마주하자면 신나게 걷다가도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늦겨울부터 이른봄 사이에 흐드러지는 동백꽃은 멀리에서도 곧 알아챈다지요. 누구라도 동백꽃 붉은 꽃망울 쉬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동백꽃송이는 걸어가면서도, 때로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알아볼 만합니다.
그러나, 제비꽃이나 꽃마리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적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일쑤예요. 100킬로미터나 120킬로미터, 아니 80킬로미터나 60킬로미터로 달린다 하더라도 제비꽃이나 꽃마리 빛깔도 내음도 모습도 무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천천히 걷다가는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걸음을 멈출 뿐 아니라 쪼그려앉아야 합니다. 쪼그려앉을 뿐 아니라, 흙바닥에 털썩 앉아서 고개를 한참 들이밀어야 합니다.
작은 꽃은 작은 사람 작은 눈길을 바랍니다. 작은 꽃일수록 더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작고 가녀린 이웃들일수록 더 찬찬히 헤아려야겠지요. 작고 가녀리며 가난한 이웃을 슥슥 지나치는 눈길로 바라본다면, 서로 어깨동무할 손길을 찾을 수 없어요.
자가용에서 내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 작고 가녀리며 가난한 이웃 마음을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곧, 두 다리로 숲길 천천히 거닐며 숲바람과 봄바람 느끼다가 문득 멈추어서 발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는, 무릎을 꿇거나 엉덩이를 흙바닥에 대고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제비꽃이며 꽃마리를 알아채고는 인사를 건넬 수 있어요.
기왓장 얹은 흙울타리 한쪽에 접시꽃잎 돋습니다. 꽃대가 오르며 꽃망울 맺히자면 더 있어야겠지요. 조글조글 보드라운 접시꽃잎은 다른 봄풀처럼 맛난 봄나물 될까요.
제비꽃보다는 아주 조금 큰 현호색이 디딤돌 한쪽에 옹크립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알아볼까요, 눈이 밝은 사람이더라도 못 알아볼까요. 이곳에 한 송이, 저곳에 두 송이, 알록달록 나란히 핍니다. 봄맞이 누리는 사람들한테 어떤 이야기 건네고 싶어, 이렇게 작은 꽃이 이렇게 구석진 자리에서 호젓하게 꽃내음 내뿜을까요.
현호색 앞에서 한참 쪼그려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포두면 금사마을에서 금탑절까지 자동차로 싱싱 오갈 만한 길을 뚫었으면, 현호색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금탑절 곳곳에 시멘트를 깔아 비오는 날에도 질퍽거리지 않도록 한다면, 이 작은 들꽃 현호색이 금탑절 곳곳에 뿌리를 내려 마알간 꽃선물 할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무르익으려고 한창 애쓰는 함박꽃가지 예쁩니다. 함박꽃은 함박웃음처럼 크게 벌어져도 곱고, 아직 꽃봉오리 맺지 못하고 천천히 기운을 모으며 봄볕 받는 꽃가지로 있을 적에도 곱습니다.
꽃다지는 어떤 풀이 될까요. 겨울 이기고 봄 누리는 반가운 봄나물 내음으로 다가오는 풀일까요.
꽃다지도, 봄까지꽃도, 코딱지나물(광대나물)도, 냉이도, 꽃마리도, 모두 반가우며 고마운 봄나물이요 봄풀이며 봄꽃입니다. 잎사귀 하나 뜯어서 먹어도 봄맛이요, 꽃대와 꽃송이까지 통째로 먹어도 봄맛입니다.
나물로 먹기 앞서 오래도록 들여다보셔요. 꽃다지 노란 꽃잎과 꽃술 들여다보셔요. 얼마나 작은 꽃이요, 얼마나 사랑스러운 꽃인가 하고 마주하셔요. 그러고 나서, 즐겁게 뜯어 즐겁게 먹어요. 꽃다지 한 송이가 내 몸속으로 들어와서, 꽃다지와 내가 하나되는구나 하고 느껴요. 봄까지꽃 뜯어서 먹으며, 봄까지꽃이랑 내가 한삶으로 지내는구나 하고 느껴요.
우리는 누구나 먹는 대로 삶을 빚어요. 우리가 먹는 밥은 모두 우리 숨결이에요. 우리가 마시는 물과 바람도 우리 숨결이에요. 맑은 밥 먹으면서 맑은 숨결 돼요. 맑은 물 마시면서 맑은 숨소리 내지요. 맑은 바람 들이켜면서 맑은 눈빛 밝혀요.
머위꽃이 피고 머위잎이 퍼집니다. 숱한 봄풀 사이에서 머위꽃은 몹시 커다랗게 보입니다. 아직 활짝 벌어지지 않은 머위꽃은 통째로 먹는 고마운 나물이 됩니다. 머위야, 머위야, 내 몸으로 들어와서 더 아름답게 피어나렴. 톡, 하고 하나 뜯습니다.
우람한 동백나무 곁으로 천등산 줄기를 바라봅니다. 금탑절 서림 스님이 내어주는 따스한 찻물 한 잔 받습니다. 바람 고요한 아침나절, 풍경소리 또한 고요합니다. 절집 옆에서 일찌감치 꽃을 피우고는 진 복수초는 씨앗을 맺느라 바쁩니다. 복수초는 꽃으로도 어여쁜데, 이렇게 씨앗 맺는 푸른 빛깔 또한 앙증맞고 어여쁩니다. 아예 밭을 이룬 수선화들은 꽃송이 벌어질 적에도 예쁘지만, 꽃송이 벌어질까 말까 망설이는 때에도 예쁩니다.
푸른 물결일까요. 노란 물결일까요. 바다는 파란 물결이다가도 때로는 푸른 물결인데, 봄들판은 어떤 물결 되어 우리들 마음속으로 젖어들까요.
수선화밭 가장자리에는 할미꽃이 곱다시 핍니다. 할미꽃과 수선화 사이에는 봄까지꽃이 돋습니다. 수선화만 예쁘다 여기면 봄까지꽃이고 할미꽃이고 뽑히겠지요. 서로 다른 봄꽃이 서로 다르게 어여쁘다 여기면, 모두 한 자리에서 즐겁게 피어나면서 봄빛 베풀겠지요.
서림 스님 옷소매 닳은 모습을 뒤에 서서 바라봅니다. 스님이 한손을 뻗어, 저기 닥종이 만드는 닥나무에 핀 꽃을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삼지닥나무라 한다는데, 꽃이 필 적에 저렇게 예쁘다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닥종이로 다시 태어나도 어여쁘며, 닥나무에 꽃망울 맺혀 온통 꽃잔치를 이루어도 어여쁩니다. 절집에 와서 부처님한테 절은 않고, 절집을 둘러싼 작고 작은 꽃이랑 소담스럽고 소담스러운 꽃을 마주하며 끝없이 허리를 숙입니다. 자꾸자꾸 고개를 숙입니다.
키 작은 꽃을 찬찬히 들여다보자면, 허리를 숙일밖에 없어요. 키 작은 꽃송이 사진 하나로 담자면 고개를 숙일밖에 없어요. 아예 땅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해야 합니다.
금탑절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금 진달래를 만납니다. 진달래 바라보며 방긋 웃습니다. 네 빛 보고 또 보아도 더할 나위 없이 곱구나. 사람들이 시멘트건물에 갇힌 채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본다든지 칠판만 쳐다본다든지 참고서만 파헤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사람들이 너른 들판에 서서 햇살 먹으면서 너희 봄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가슴 가득 꽃마음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일 텐데. 어른들도, 아이들도, 고등학교 수험생도, 누구라도 이 좋은 봄날, 숲길 천천히 거닐며 봄노래 부른다면, 우리 고흥 시골마을 아리땁게 돌보는 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나는 금탑절에서 내려와 백치성을 끼고 지정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멧길을 갑니다. 군청에서는 이 멧길을 아스팔트로 깔려고 공사를 합니다. 자동차 넘나들기 좋게 아스팔트 깔아도 되겠지요. 그런데, 자동차는 안 다녀도 좋아요. 사람들 누구나 호젓하게 이야기꽃 피우며 도란도란 거니는 숲길로, 흙길로, 거님길로, 마중길로, 마실길로 고이 지킨다면, 훨씬 좋으면서 널리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자가용 몰며 싱싱 달리는 길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샘솟지 못하거든요. 한국사람은 외국으로 여행을 가면, 자가용 내려놓고 오래도록 걸어다니면서 즐거운 이야기 길어올리거든요. 막상 한국에서는 자가용을 내려놓지 못한 채 이곳저곳 쏘다니다가, 그만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말거든요. 4346.3.2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 길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