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꿈꾸며 읽는 책 ― 겨울햇살 따사로운 책읽기
나는 어릴 적부터 마늘을 퍽 잘 먹습니다. 날마늘도 스스럼없이 잘 먹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 부엌일을 거들며 마늘까기를 곧잘 했는데, 인천에서 나고 자라면서 ‘가게에서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다져서 쓰는 마늘’만 보았을 뿐, 마늘을 어떻게 심고 돌보며 거두어들이는가를 본 적 없습니다.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처음 들고는 열두 해가 지나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학교에서 ‘마늘 한살이’를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교사는 없었어요. 다섯 학기를 다니다가 그만둔 대학교에서도 어느 교수나 선배도 ‘마늘 심기·마늘 캐기’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지난 2011년 늦가을,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에 네 식구 깃들었습니다. 시골로 가고 싶다는 분들은 좀처럼 빈집을 못 얻는다 하지만, 우리 식구는 큰 어려움 없이 빈집 한 채 얻어 사뿐히 보금자리를 틀었어요. 고흥 시골마을에서 처음 겨울나기를 하면서 ‘마늘 심기’를 구경합니다. 한가을에 바지런히 벼를 베고는 이내 논을 갈아엎어 거름을 내고 보름쯤 묵힌 다음 골을 새롭게 내어 쪽마늘을 촘촘히 심습니다. 마늘 심기는 무척 고되고 품이 많이 들어 마을 할머님들이 서로 품앗이로 합니다. 지난날에는 보리나 밀을 심었다는데 요사이에는 마늘이 돈이 되기에 마늘을 심는다 해요. 아무래도 예전에는 ‘돈’ 아닌 ‘먹을거리’를 얻으려 했을 테니까, 빈 들판마다 보리를 가득 심어 새봄부터 가을까지 먹을 끼니를 헤아렸겠지요.
따스한 남녘마을이니 마늘을 심을 만하구나 싶으면서도, 눈바람 거의 들지 않는 남녘마을이라 걱정없다 싶으면서도, 겨우내 한두 차례 드물게 찾아온 눈서리를 맞는 마늘싹을 보며 애처롭구나 생각합니다. 한겨울에 푸른 싹을 낸 마늘에 내려앉은 눈송이와 얼음덩이라니. 그러나 푸른빛 마늘싹은 아랑곳하지 않아요. 외려 이런 추위와 눈얼음쯤 한두 차례 지나야 더 씩씩하고 푸르게 자라는가 봐요. 한겨울 지나고 꽃샘바람 스산히 지나가면 무럭무럭 꽃대(마늘쫑)를 올리고, 꽃대를 뽑을 무렵 마늘도 뽑습니다.
강예린 님과 이치훈 님이 쓴 《도서관 산책자》(반비,2012)라는 책 174쪽을 읽습니다. “느릿한 속도로 도서관을 꾸리고, 같은 마음으로 멀리까지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할 계획이라고 한다. 긴 시간을 감수하고 오는 사람들은 사진책을 찬찬히 들여다볼 준비를 하고 올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삶에는 ‘느림’도 ‘빠름’도 없습니다. 느리게 늙는 사람도 빨리 늙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삶을 누립니다. 이른여름에 심어 한가을에 거두는 나락처럼, 늦가을에 심어 늦봄에 캐는 마늘처럼, 모든 목숨은 스스로 푸르게 자랍니다. 예순 나이에도 새롭게 배우고 여든 나이에도 새삼스레 배워요. 열 살 어린이가 어른한테 삶을 일깨우곤 하고, 스무 살 젊은이가 어르신한테 삶을 깨우치기도 해요.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을 때에 삶이 환하게 빛나요.
웬디 이월드 님과 알렉산드라 라이트풋 님이 함께 쓴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포토넷,2012)라는 책 116·118쪽을 읽습니다. “사진이나 글을 통해 자기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도록 아이들을 격려할 때,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임을 깨닫는다 … ‘아이들은 이것이 단지 연습문제 74번이 아니라 ‘내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내 이름을 부른 교사는 몇 안 됩니다. 담임교사조차 이름 아닌 ‘번호’를 불러 버릇했습니다. 타니카와 후미코 님이 그린 만화책 《솔로 이야기》(대원씨아이,2012) 둘째 권 18쪽을 읽습니다. “술 이름이 뭐가 어째서! 마스미는, 마스미는,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다. 제일 좋아하는 것의 이름을 제일 소중한 딸한테 붙여 주는 게 뭐가 나빠!” 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참으로 가장 사랑하는 길을 걷고, 가장 사랑할 만한 말을 하며, 가장 사랑할 보금자리를 돌봐야지 싶습니다. 가게에서 사다가 먹던 마늘 아닌 손수 심어서 거두는 마늘을 바라보며 사랑을 떠올립니다. 내 손으로 아이들 기저귀와 옷가지를 빨래하고, 내 손으로 밥을 차려 아이들과 함께 먹는 하루를 떠올립니다. 한겨울이건 새봄이건,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있을 때에 따사롭습니다.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