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신생시선 33
이민아 지음 / 신생(전망)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시와 물고기
[시를 말하는 시 9] 이민아,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 책이름 :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 글 : 이민아
- 펴낸곳 : 신생 (2012.12.20.)
- 책값 : 8000원

 


  읍내 저잣거리에서 언 명태 한 마리를 삽니다. 물고기 파는 아주머니한테 “동태 어떻게 주시나요?” 하고 여쭈니 “언 명태요?” 하고 말씀하시기에, 이때부터 나도 ‘언 명태’라고 말합니다. 고장마다 쓰는 말이 다르잖아요.


  한 번은 언 명태하고 오징어를 장만합니다. 언 명태 끓인 찌개를 즐겁게 먹고 나서, 다음에는 언 명태하고 갈치를 장만합니다. 지난번에 언 명태 장만해서 찌개 끓일 적에는 무와 감자를 함께 넣었고, 이번에는 언 명태 장만하며 얻은 조개를 함께 넣습니다. 콩나물도 넣고, 버섯에 칼집 잘게 내어 함께 넣습니다.


  물고기 끓이는 찌개는 그리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 번 두 번 끓이면서 차츰 손에 붙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잘 끓이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누구나 즐겁게 자주 끓이면서 차근차근 맛나게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문득 어떤 날들이 그리울 때는 / 하나서점으로 간다 ..  (하나서점)


  나물을 볶습니다. 날로 뜯어서 먹는 나물을 퍽 좋아하기에, 날나물도 한쪽에 차리고, 다른 나물 한 가지는 폭 삶으며, 또 다른 나물 두 가지는 볶습니다. 나물은 나물맛이 나고 나물내음이 납니다.


  날마다 밥을 새로 지으며 날마다 새로운 밥맛을 누립니다. 똑같이 밥을 차려서 먹는다지만, 똑같은 밥은 없습니다. 새롭게 쌀을 씻고 새롭게 물을 맞추며 새롭게 불을 올려요. 김 모락모락 나는 밥을 그릇에 새롭게 풉니다. 아이들을 새롭게 부르고, 숟가락을 새롭게 듭니다. 모두 새로운 삶이고 흐름입니다.


  봄에 돋는 봄나물은 봄맛입니다. 여름에 올라오는 여름나물은 여름맛입니다. 가을에는 가을맛을 누리지요. 겨울에는 겨울맛을 즐깁니다. 똑같은 풀이 없고, 똑같은 맛이 없어요. 나는 들풀 한 가지를 가리켜 늘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 들풀 한 가지는 돗나물만은 아니고 미나리만은 아니며 쑥만은 아닙니다. 같은 쇠비름이라 하더라도 줄기와 잎과 뿌리가 모두 다른걸요.


..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  (혁필화를 보며)


  구름이 낍니다. 바람이 붑니다. 멧새가 날아갑니다. 바람결에 풀잎이 간들거립니다. 후박나무에 새싹이 움트려 하고, 동백나무 봉우리가 터질듯 말듯 말랑말랑합니다.


  빗방울이 들어 흙이 녹습니다. 구름이 흐르며 햇살을 가립니다. 달이 고개를 내밀고, 별이 몇몇 구름 사이로 보입니다. 이웃 할머니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고, 경운기 모는 할아버지가 저 멀리 보입니다.


  하루가 흐릅니다. 아침이 찾아오고, 낮이 지나갑니다. 저녁이 찾아들며, 밤이 익습니다.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데, 늘 새롭게 찾아오는 하루라 한다면 늘 새롭게 찾아오는 사랑으로 삶이 이루어질까요. 내 몸은 얼마나 새롭고, 내 마음은 어느 만큼 새롭다 할까요. 내가 부르는 노래는 얼마나 새로우며, 아이들 웃음과 몸짓은 얼마나 새삼스럽다 할는지요.


.. 굴비와 어머니, 둘은 참 닮았지만 또 닮지 않았지요 ..  (굴비)


  웃음은 웃음으로 이어집니다. 골을 내거나 성을 부리면 골이나 성으로 이어집니다. 풀 한 포기 뜯으면 풀줄기는 더 씩씩하게 퍼집니다. 풀 두 포기 뜯으면 풀잎은 더 푸르게 돋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어 하루를 빛낼까요. 사람은 서로서로 어떤 넋이 되어 하루를 일굴까요.


  소쿠리 하나 들고 집 언저리 풀밭을 기웃거리면, 한 끼니 넉넉히 먹을 풀을 얻습니다. 식구들 누릴 풀포기는 흙에 뿌리를 내린 채 바람과 햇살과 빗물을 먹으며 자랍니다. 비료도 농약도 항생제도 비타민도 뭣도 뭣도 따로 안 먹습니다. 바람을 먹고 햇살을 마시며 빗물을 들이켜서 스스로 자랍니다. 더군다나, 똑같다 싶은 바람과 햇살과 빗물을 먹고 즐기면서도 다 다른 풀이 되어 자라요. 한 갈래 풀이라 하더라도, 돋아서 자라는 자리에 따라 빛깔이랑 크기랑 맛이랑 냄새가 조금씩 달라요.


  오늘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집어넣는 학교를 문득 생각합니다. 학교는 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똑같은 틀로 맞추는 구실을 해요. 학교를 다닌 아이들 가운데 좀 다르다 싶거나 새롭다 싶은 모습을 찾기 무척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은 우리한테 찾아온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똑같은 틀로 맞추어 다 똑같은 도시에서 다 똑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도록 길들이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삶을 누리도록 다 다른 사랑을 저마다 펼치거나 나누기보다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똑같은 돈을 벌도록 다 똑같은 지식과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도록 떠미는 셈이지 싶어요.


.. 배에서는 마주치는 사람의 /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세석에서)


  언 명태 찌개를 끓이면서, 나물을 볶고 무치고 삶고 씻으면서, 밥을 안치면서, 밥상을 차리면서, 아이들과 옆지기를 부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터에서 다 다른 이야기를 일군다면, 다 다른 사람이 쓰는 글은 다 다른 문학으로 피어나겠지요.


  잘나거나 못난 문학이 없습니다. 돋보이거나 그저 그런 문학이 없습니다. 어느 문학이든 그 문학을 빚은 사람 삶을 드러낼 테니까요.


  그러면,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문학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글쓰기를 배울 수 있을까요. 문학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문학상이란 무엇일까요. 문학밭에 왜 상장이나 훈장이 있어야 할까요. 등단은 무엇이고 책은 무엇일까요. 대학교에는 왜 문학 가르치는 학과 있어야 할까요. 대학교에는 왜 흙일꾼이나 고기잡이나 집살림꾼 이끄는 교수는 한 사람조차 없을까요. 아니,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조차 흙일꾼이나 고기잡이나 집살림꾼 이끄는 교사 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가요.


.. 법원에서 서류가 도착했다 /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 냉면 먹으러 가요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요 / 내가 조르자 어머니, 밥상 치운지 얼마나 됐다고! / 그러면서도 어머니 앞장서서 함흥냉면집 들어서는데 / 주문이 오기도 전에 냉면 둘이요! / 나도 어머니도 매운 냉면 둘이요! ..  (냉면, 매운)


  이민아 님 시집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신생,2012)를 읽습니다. 물고기 비릿한 내음 짙은 시집 읽습니다. 아왜나무는 보기 드문 나무라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눈여겨보면 우리 곁에 흔하게 자라는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은 언 명태이든 안 언 명태이든 물고기 모습으로 흔히 볼 테지만, 집에서 살림 안 하는 사람은 누군가 차려서 내놓는 찌개 모습으로만 명태를 흔히 봅니다.


  나물을 뜯으며 풀줄기와 풀포기와 풀잎과 풀꽃을 마주합니다. 풀꽃 사진만 찍는다면 풀꽃 맛이랑 내음이랑 빛깔을 다른 테두리에서 바라보겠지요. 스스로 아이를 낳아 날마다 복닥이면서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때하고, 골목마실이나 인도마실이나 티벳마실을 다니며 ‘문명하고 퍽 떨어진 데에서 지내는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만 할’ 때하고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아이는 똑같이 아이라 할 테지만, 아이를 마주하는 사람(어른)들 삶이 다릅니다.


  언 명태에 서린 비릿한 기운을 빼려고 오래도록 물에 담그고, 틈틈이 물갈이를 합니다. 나물에 깃든 쓴 기운을 빼려고 한참 물에 담그고, 자주 물갈이를 합니다. 내 삶을 북돋우고 싶어 졸졸 흐르는 냇물을 마시고, 구름을 이끌며 흐르는 바람을 마십니다. 시 하나로 태어나는 글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하고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4346.2.1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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