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김일주 / 민음사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30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
―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김일주 사진
 민음사 펴냄,1996.6.25./35000원

 


  내 살가운 사진벗 가운데 한 분은 로모사진기로만 사진을 찍습니다. 한 팔을 곧게 뻗어 거리를 잰 다음 찰칵 하고 눌러 사진을 빚습니다. 한 통을 다 찍으면 사진을 값싸게 만들어 주는 데에서 필름을 찾습니다. 누리사랑방에 ‘필름 한 통 찍은 사진’을 통째로 고스란히 올립니다. 이 사진들을 바라보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좋아하며 누리는 삶이랄까요, 사진과 벗삼으며 하루하루 즐기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여러 해째 ‘로모 사진’을 그분 누리사랑방에서 지켜보면서 오늘 문득, ‘사진은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있어 재미있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김일주 님이 한국 문학가를 찾아다니며 찍은 ‘얼굴사진’을 그러모아 엮은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민음사,1996)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책머리에 “모쪼록 이 사진집의 발간으로 우리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보다 더 문학과 가까워지고 우리 문학이 풍성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발간사).” 하는 말이 실립니다. 참말, 이 책머리 이야기처럼 이 사진책 하나가 조그맣게 밑거름 구실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은 그닥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시인 저런 소설가 골고루 얼굴사진 실으려 하면서, 너무 밋밋한 책이 되고 말아요. 이런 작가한테는 이런 삶이 있을 테고, 저런 작가한테는 저런 생각이 있을 텐데,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이런 작가한테 어떤 삶이 있고 저런 작가한테 어떤 생각이 있는가 읽기 몹시 힘들어요. 여러 작가들 얼굴은 들여다볼 수 있지만, 작가마다 다른 삶과 생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온갖 작가를 만나기 쉽지 않은 만큼, 비슷비슷한 행사 자리에서 마주치며 바지런히 찍은 사진을 실을밖에 없기도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행사 자리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작가마다 어떤 삶을 일구며 어떤 생각을 글에 녹였는가를 찬찬히 헤아린다면, 다 다른 얼굴빛 다 다른 삶빛 다 다른 넋빛을 사진으로 실을 만하지 않았을까요. 2008∼2009년에 사진잔치를 열 적에 김일주 님은 ‘8만 장’에 이르는 얼굴사진을 마흔 해에 걸쳐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틈틈이 사진잔치를 여는 만큼, 8만 장 가운데 새롭게 선보이는 사진이 있을 테고, 거듭 선보이는 사진이 있겠지요. 그러면, 1996년에 처음 나온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고침판을 한 번쯤 낼 만하지 않으랴 싶어요. 밋밋하거나 싱거운 ‘백과사전 같은 사진책’을 넘어,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책’을 기쁘게 베풀 만하리라 생각해요. 작가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는 모습도, 작가마다 다른 삶과 넋으로 술과 담배를 벗삼는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어요. 작가들이 마이크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도, 작가마다 다른 빛과 얼로 이야기꽃 피우는 모습으로 밝힐 수 있어요. 작가 한 사람 모습을 예전과 오늘을 견주며 드러낼 수 있겠지요.


  더 많은 글작가를 만나서 더 많은 사진을 남겨야 하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아카이브 쌓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 사람을 즐겁게 마주하면서 즐거운 사랑을 느끼며 즐거운 사진으로 일굴 수 있으면 돼요.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사진에 있는 줄 되새길 수 있기를 빕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찾아 즐기는 ‘바로사진(즉석사진)’도 있는데, 사진이 바로 나온다 하더라도, 종이에 그림이 뜨기까지 ‘천천히 기다리’지요. 디지털사진이라면 찍자마자 창에 짠 하고 뜨기에 ‘기다리는 맛’은 없다 할 텐데, 디지털파일로 들여다볼 때에는 어떠한 사진이든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없어요. 필름으로 찍거나 디지털로 찍거나, 내 집이나 일터에 붙이려 한다면 종이에 앉히잖아요. 종이에 앉히기까지 ‘잘 앉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벽에 ‘종이로 앉힌 사진’을 붙이고 나면 한 달 한 해 열 해 스무 해 두고두고 바라보는 ‘오래도록 즐기는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사진’이나 ‘얼굴사진’이란 사람 겉모습을 찍거나 얼굴 생김새를 찍는대서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시인 저런 소설가를 더 많이 찍어야 “한국 현대 문학 얼굴”을 말하는 사진책을 엮을 수 있지 않습니다. 시인한테 어떤 삶이 있고 소설가한테 어떤 사랑이 있으며 수필가한테 어떤 꿈이 있는 한편 극작가한테 어떤 생각이 있는가를 환하게 드러내는 웃음꽃이 ‘사람들 얼굴 모습에서 피어날’ 때에 비로소 사람사진이나 얼굴사진이 됩니다. 한 사람을 찍더라도 ‘기나긴 해를 글 한 줄 쓰며 살아온 글벗 넋’을 내 넋으로 받아들여 어깨동무하는 손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를 쓰는 동안에는 가난도 뭐도 모두 잊어요. 오직 글 하나에 삶을 바칩니다. 글꽃이란 삶꽃입니다. 빙그레 웃거나 슬프게 울면서 시를 씁니다. 웃음꽃이 시꽃이 되고, 눈물바람이 시바람이 됩니다. 노랫가락이 싯가락이 되며, 춤사위가 싯사위가 되어요.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저이를 읽은 만큼 저이 모습이 내 사진 하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내 삶벗을 헤아린 만큼 내 삶벗 이야기를 내 사진 하나로 살포시 앉힙니다. 어느 작가가 내놓은 작품을 열 권쯤 읽은 뒤하고, 어느 작가가 내놓은 작품을 아직 한 권도 안 읽은 뒤하고, 내가 찍을 사진은 같지 않습니다. 어느 작가하고 도란도란 오랜 나날 이야기꽃을 피운 뒤하고, 어느 작가하고 처음 마주한 자리하고, 내가 느끼며 찍을 사진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아요.

  천천히 찍으면 됩니다. 천천히 오래도록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을 사람들이 천천히 오래도록 즐기기를 바란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천천히 오래도록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을 사람들이 ‘더 많은 작가’ 얼굴을 바라보기를 바란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도 그저 ‘더 많은 작가’를 만나려고 잰걸음 놀리면서 더 많은 작가를 찍으면 됩니다. 4346.2.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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