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사람들

 


  봄까지꽃이 피었습니다. 언제부터 피었을까 가늠해 봅니다. 어제 따스한 겨울비 내리고 나서 오늘 햇살 곱게 드리우면서 피었겠지요. 꽃몽우리는 더 일찍 맺혔을 수 있지만, 아직 찬바람이 불어 몽우리로만 있다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는 더 참지 못하고 활짝 꽃잎을 터뜨렸구나 싶어요. 이제 우리 집 아이들은 맨발에 얇은 겉옷만 입고도 마당에서 놀고 집에서 놀고 해요. 저도 집에서는 반바지와 반팔티를 입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아요.


  다만, 전라남도 고흥이니까 이만큼일 테지요. 같은 전라남도라 하더라도 구례나 곡성은 다를 테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서 임실이나 익산이라면, 전주나 청주라면, 음성이나 진천이라면 달라지겠지요. 서울을 지나 포천이나 김포나 파주가 되어도 다를 테고요.


  나는 꽃을 보고 싶기 때문에 봄꽃을 봅니다. 나는 꽃을 보고 싶어서 봄꽃을 기다립니다. 꽃잎을 어루만지며 꽃잎을 읽습니다. 풀잎을 쓰다듬으며 풀잎을 읽습니다. 논둑을 밟습니다. 흙이 천천히 녹으며 보송보송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이 흐르다가는 몽땅 사라져 파랗디파란 바다가 흐릅니다. 한낮에는 별을 얼마나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하늘을 읽습니다. 밤에는 얼마나 많은 별을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별을 읽습니다.


  종이에 글을 찍어도 책입니다. 이른바 종이책입니다. 전기를 먹는 매체에 글을 띄워도 책입니다. 이른바 전자책입니다. 따로 글을 찍거나 띄우지 않더라도, 나무 한 그루 바라보며 나무살이 읽을 수 있으면 나무책입니다. 어떤 글 한 줄 떠돌지 않더라도, 풀잎 하나 멧새 날갯짓 하나 읽을 수 있으면 풀책이요 새책입니다.


  큰아이가 도랑물 소리를 가만히 듣더니 ‘푸르락 푸르락’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 말소리를 곱씹으며 도랑물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니 ‘푸르락 푸르락’ 하고 물방울 구르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는 또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하고 곰곰이 마음을 기울입니다. ‘또랑 또랑 또랑 또랑’ 하고 흐른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날에 따라서, 도랑물 소리는 늘 다른 노랫소리로 나한테 스며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책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책을 읽습니다. 다만, 누구나 읽는 책은 종이로 된 책이나 전자 매체로 된 책은 아닙니다. 언제나 읽는 책은 꼭 종이책이거나 전자책이어야 하지 않아요.


  숲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빗방울을 읽거나 눈송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봄꽃을 읽거나 봄나물을 읽을 수 있어요. 읽고 싶기에 읽습니다. 읽고픈 마음이기에 읽습니다. ‘갓’이라는 이름을 몰라도 겨우내 들판에 스스로 자라는 갓풀을 마주하며 즐겁게 뜯어 즐겁게 김치를 담근다든지 날나물로 먹는다든지 할 수 있어요. 풀읽기를 할 수 있으면 돼요.


  마음이 끌리는 사람하고 사귀면서 사랑읽기를 합니다. 마음이 맞는 동무하고 어깨를 겯으며 마음읽기를 합니다. 우리들은 늘 삶을 읽습니다. 삶은 종이책으로도 읽을 수 있고, 삶은 눈빛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삶은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올해에 나는 새롭게 한 가지 책읽기를 하고 싶습니다. 내 어린 날에는 거의 날마다 할 수 있던 ‘무지개 책읽기’를 하고 싶어요. 올해에는 아리땁고 해맑은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요. 434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