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란 말도 없이
우에노 켄타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08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
― 안녕이란 말도 없이
 우에노 켄타로 글·그림,오경화 옮김
 미우 펴냄,2011.12.30./9000원

 


  아이들 옷가지를 두 손으로 복복 비벼 빨래를 하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차츰 맑은 기운 서리고, 천천히 밝은 생각 샘솟습니다. 한겨울 손빨래는 손발 시린 고된 일이라 여길 수 있을 테지만, 한겨울에도 손빨래는 마음을 정갈히 씻거나 다스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식구들 함께 먹을 밥을 차리느라 한두 시간 가볍게 씁니다. 밥을 사다 먹는다든지, 밥차림을 ‘가시내(어머니)’한테 도맡기면서 이동안 다른 일을 한다면, 이른바 ‘생산성’이 있다든지 ‘경제성’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대수로울까 궁금해요. 우리는 생산성이나 경제성을 높이려고 하루하루 살아가나요.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고 싶기에 내 목숨을 누릴까요.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리며 비질이랑 걸레질을 하는 까닭은 ‘몸을 고되게 움직여 집안일을 나누어 맡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삶을 살찌우고 사랑을 살리기에, 집살림을 합니다.


  예부터 사람들이 손수 나무를 베고 손질하고 깎고 다듬어 집을 세운다든지, 연장을 만든다든지 하면서 오랜 품과 겨를을 들인 까닭은 천천히 헤아려요. 왜 여러 달에 걸쳐 나락을 돌보아 거두었을까요. 왜 여러 달에 걸쳐 푸성귀를 심어 거두었을까요.


  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으로 맺어 아이를 열 달에 걸쳐 천천히 돌보아 낳을까요. 왜 아이들은 기나긴 해에 걸쳐 천천히 자랄까요. 왜 어버이는 아이들을 기나긴 해에 걸쳐 천천히 보살피며 삶을 누릴까요.

 

 


- 언제나 둘이서 함께 하기로 했던 마음을 잊지 맙시다. 매일을 둘이서 엮어 나가 벌써 이만큼이나 길어졌구나, 라고 확인하는 길목의 하루가 바로 오늘이로군요. (12쪽)
- 일하는 틈틈이 물건을 정리하는 김에 키호화 함께 한 추억의 조각들을 찾기 시작했다. (192쪽)
- ‘늘 함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힘들 때 나지막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키호는 말했다. (258쪽)


  고흥 시골집에서 인천 골목동네로 마실을 갑니다. 인천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사진동아리 아이들하고 골목동네를 걷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겨울방학을 맞이해 학교 공부를 홀가분히 잊고는, 저마다 이녁 걸음걸이에 맞추어 천천히 골목동네를 걷습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작은 집이 나란히 어깨동무하며 이루어진 어여쁜 골목동네를 걷습니다.


  인천 중구 율목동에서 경동으로 넘어서는, 그러니까 행정구역으로 치면 동이름이 바뀌는 언저리에 있는 오래된 피아노학원 하는 골목집 마당에서 자라는 쉰 살쯤 먹음직한 높다란 감나무 굵은 가지에 직박구리 세 마리 오순도순 앉아 언감을 쪼아먹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발걸음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귀를 기울입니다. 직박구리 세 마리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한테도 직박구리 노랫소리 함께 듣자고 말을 건네는데, 귀를 기울이는 아이가 있고, 다른 데에 바빠 조잘조잘 떠들며 노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 노랫소리에 마음이 끌리면 골목새 노랫소리를 들을 테고, 동무들과 수다 떠는 즐거움에 끌리면 서로서로 조잘조잘 수다 떨기에 빠지겠지요.


  인천에서 사진동아리 아이들과 골목동네 걷기를 마친 이듬날, 시외버스를 타고 인천에서 순천으로 달립니다. 순천에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들어섭니다. 호젓하고 조용한 고흥에 닿아 기지개를 켭니다. 아직 읍내이니 두멧시골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군내버스를 탈까 하고 시계를 보는데, 마침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가 1분 앞서 떠났습니다. 이런. 고작 1분 사이로 버스를 놓치네. 다음 버스는 두 시간 뒤에 있는데.


  읍내를 천천히 걸어 가게에 들릅니다. 집식구 먹을 여러 가지를 장만합니다. 군내버스 놓친 데에는 다 어떤 뜻이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택시를 불러 집으로 달립니다. 택시를 타고 읍내를 벗어나 포두면을 지나고 도화면으로 접어드는데, 저 먼 멧등성이 너머로 저녁해 붉게 빛납니다. 아이들이 빨간 물감 풀어 하얀 종이에 곱게 그림을 그린 듯한 어여쁜 해님이 붉게 타오릅니다.


  집으로 돌아왔네,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우리 마을이네, 하고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붉은 해님을 만나고, 낮 동안 노란 해님을 즐기는 우리 시골입니다. 해님이 푸른 숲 멧자락 사이로 뜨고 지는 모습을 어디에서 보겠어요. 바로 시골에서 보겠지요. 도시에서 이런 멋진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공장 가득한 곳에서 이런 그림을 볼까요. 핵발전소 곁이나 골프장 둘레에서 이런 그림을 보나요.

 

 


- 응급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인공호흡을 반복했지만, 반응은 없었고, 내가 인공호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50쪽)
- 난 언제나 키호의 병을 두려워했다. 일상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했다. 예정이 틀어질까 봐 두려워했다. 가장 힘든 건 키호 본인인데, 이때 난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87쪽)
- 집안은 싸늘할 정도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 집의 소중한 일부가 쏙 빠져버린 것도 모르는 것처럼. (108쪽)


  저녁바람 포근합니다. 한겨울이지만 고흥 시골마을 저녁바람은 포근합니다. 흔히 시골은 겨울이 더 춥다고들 일컫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시골은 겨울에 안 춥습니다. 시골은 겨울에 한결 따스합니다. 시골바람을 살가이 누리고 싶다면, 겨울에 겨울바람 얼마나 포근한가 느끼도록 시골에서 지내야지 싶어요. 봄에 봄바람 얼마나 시원한가 궁금하다면, 봄철 시골에서 지내야지 싶어요. 봄에 여름바람 얼마나 상큼한지 궁금하다면, 여름철 시골에서 지내야지 싶어요.


  깊은 밤 기저귀에 쉬를 눈 작은아이가 잠에서 깹니다. 작은아이 바지를 갈아입히고 기저귀를 새로 채웁니다. 나도 밤오줌 눌까 생각하며 작은아이 안고 마당으로 내려옵니다. 시골에서는 밤오줌을 밖에서 누며 별바라기를 즐깁니다. 따로 별바라기 즐기려고 저녁마실을 하기도 하지만, 깊은 밤이나 새벽에 부러 마당으로 내려오고 풀숲으로 들어섭니다. 깊은 밤이나 새벽에 논둑에 서거나 밭둑에 섭니다.


  포근한 바람을 느끼며 별빛을 먹습니다. 따사로운 바람을 생각하며 별빛을 아로새깁니다. 내가 바라보는 저 별에서는 이 지구별 빛을 바라보겠지요. 내가 마주하는 저 별에서는 이 지구별 빛을 누리겠지요. 저 별은 지구에 드리우고, 지구는 저 별로 드리웁니다. 내 마음은 아이한테 닿고, 아이 마음은 나한테 닿습니다. 내 마음은 내 어버이한테 닿으며, 어버이 마음은 나한테 닿아요.


-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다. 그곳에는 반드시, 내가 돌아오길 기다려 주는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까. (16쪽)
- 어디에 가든 키호의 존재가 촛불처럼 마음속에 불을 밝혀 주었다. 돌아오면 언제나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199쪽)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들 마음이 이 옷자락에서 내 손으로 스며듭니다. 밥을 하는 동안 내 마음이 밥이랑 국이랑 반찬에 담겨 아이들 몸으로 스며듭니다. 아이들 안거나 눕혀 자장노래 부르면, 내 몸과 아이들 몸에 고운 노랫마디 젖어듭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떠들면서 뒹굴고 놀면, 아이들 목소리는 아이들 몸과 내 몸에 젖어듭니다.


  서로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서로 사랑을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서로 아끼는 목소리입니다. 서로 꿈을 아끼는 목소리입니다. 서로 보살피는 목소리입니다. 서로 마음을 보살피는 목소리입니다.


- “기운 내. 아빠가 기운 없으면 슬퍼지잖아.” (209쪽)
-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켄타로 씨가 죽으면 난 눈물과 콧물과 침까지, 온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수분을 질질 흘리며 폐인이 되어 버릴 거니까.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 (237쪽)


  우에노 켄타로 님이 빚은 만화책 《안녕이란 말도 없이》(미우,2011)를 읽습니다. 우에코 켄타로 님이 옆지기를 잃은 마음을 그린 만화책입니다. 옆지기를 잃고서 이녁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면서 이 만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고마움, 아쉬움, 슬픔, 기쁨, 무거움, 사랑, 꿈, 믿음, 바보스러움, …… 모든 마음을 그림 하나에 알알이 담고 싶었다고 해요. 이녁 옆지기하고 서로 빚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해요.


  두 분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빚은 삶이었을까요.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내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어떤 이야기를 빚는 삶일까요. 내 이웃들은, 내 동무들은 저마다 어떤 보금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빚는 삶을 누리려나요.


  서로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울는지요. 서로 어떤 손길로 일을 하고 놀이를 할는지요. 서로 어떤 꿈을 키우고, 서로 어떤 사랑을 빛낼는지요. 고요하고 고즈넉한 시골 밤이 깊습니다. 4346.1.1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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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1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이란 말도 없이, 제목에서 슬픔이 느껴지네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가장 슬픈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아름다운 슬픔이에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다. 그곳에는 반드시, 내가 돌아오길 기다려 주는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까. (16쪽)
- 이 간단한 행복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왜 꼭 잃어버려야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인지...

잘 읽고 갑니다.

숲노래 2013-01-15 05:25   좋아요 0 | URL
연봉 높은 회사원이 되거나,
어떤 전문직업으로 전문가 노릇을 하거나,
정치꾼이나 교사 교수 된다거나,
기자나 작가가 되는...
이런저런 일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사랑할 삶을 누려야 대수롭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