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8] 씨앗읽기
― 씨앗회사와 정치권력 꿍꿍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으며 생각합니다. 칼을 쥐어 감자나 양파나 무나 푸성귀를 써는 내 마음속에 흐리거나 어두운 빛이 흐르면, 내 손으로 짓는 먹을거리 또한 흐리거나 어두운 기운이 서리는구나 싶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면, 아무리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놀며 밥알이나 국을 흘리더라도 따스하며 밝은 기운이 서리는구나 싶어요.


  빨래를 할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이 되어 복복 비비고 헹구어야 옷가지마다 따스하며 밝은 기운이 서려요. 아이들을 씻길 적에도 내 마음이 환하고 기뻐야, 아이들 몸을 정갈히 씻길 수 있어요.


  마음이 어두움으로 꽉 찼을 적에는, 아무리 허울좋은 예쁜 말을 내놓으려 하더라도, 어두움이 잔뜩 낀 슬프거나 새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마음이 밝게 빛날 적에는, 언제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고운 노랫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씨앗 한 알 손에 쥐어 논과 밭에 심는 사람들 마음은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흙을 밟으며 흙을 만지는 마음이 어둡다면, 씨앗에도 어두운 기운이 서리면서 흙에까지 어두운 기운이 퍼질 테지요. 밝은 마음으로 흙을 밟고서 밝은 생각 길어올려 흙을 만지면, 씨앗뿐 아니라 흙에까지 밝은 기운이 이어질 테고요.


  사람들 누구나 먹는 밥은 쌀로 짓습니다. 쌀은 나락 껍질을 벗겨 얻습니다. 나락 껍질을 살짝 벗기면 누런쌀이요, 나락 껍질을 많이 벗겨 알맹이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하면 흰쌀입니다. 나락 껍질, 그러니까 겨를 살짝 벗긴 누런쌀에는 씨눈이 남고, 겨를 벗길 뿐 아니라 하얀 알맹이만 남기려 하면 씨눈이 잘립니다.


  나락이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볍씨입니다. ‘씨가 되는 벼’, 곧 ‘이듬해에 벼를 새로 얻을 씨앗’입니다. 감자알도 이듬해에 심어 새로 거두려 하면 ‘씨감자’를 갈무리합니다. 씨알이 있어야 다시 흙을 일구면서 우리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보리도 밀도 수수도 서숙도 모두 ‘먹을 알곡’에서 ‘씨앗으로 삼을 알곡’을 따로 갈무리합니다.


  밥을 먹는다 할 때에는 씨앗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곡식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씨앗을 먹습니다. 풀이 맺는 씨앗, 이른바 곡식은 풀한테 열매입니다. 능금이나 배나 살구처럼 알이 커다랗지 않으나, 풀열매는 곡식이면서 씨앗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풀열매요 곡식인 씨앗은 ‘거두고 심고 거두고 심고’를 되풀이합니다. 거둔 씨앗을 갈무리하고 다시 심어 먹을거리를 얻으며, 새로 심을 씨앗을 둡니다. 백 해 오백 해 천 해 오천 해 만 해를 잇는 씨앗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먹는 씨앗은, 천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입니다. 천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이란, 만 해 앞서 살아가던 옛사람이 거두고 심던 씨앗이에요.


  사람을 낳는 씨앗은 사람 몸에 깃듭니다. 곡식을 낳는 씨앗은 곡식 몸, 곧 줄기와 뿌리와 잎과 꽃에 깃듭니다. 곡식 유전자를 건드려 돈을 벌려고 하는 회사는, 곡식을 이듬해에 심으면 새로 돋지 않도록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이 씨앗을 건사해서 심다가는 씨앗회사가 돈을 못 벌 테니까요. 자꾸자꾸 새로 사다 심도록 길들입니다. 처음에는 씨앗값을 눅게 파는 듯하지만, 곰곰이 따지면, 여태까지 어느 흙일꾼도 씨앗값을 돈으로 치른 적 없어요. 씨앗은 돈으로 사고팔 수 없거든요. 씨앗이란 밥이면서 목숨이기에, 스스로 제 땅을 일구어 제 삶을 일구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심고 거두며 밥을 먹었지, 돈으로 씨앗(곡식)을 내다 팔아 밥을 먹지 않았어요.


  도시가 커지고 시골을 잡아먹으면서, 흙일꾼더러 씨앗(곡식)을 도시로 내다 팔도록 부추깁니다. 흙일꾼 살림집에는 전기나 수도물이 없어도 되었으나, 흙일꾼이 전기와 수도물을 쓰도록 길들입니다. 흙일꾼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하면서, 땅을 팔고 씨앗(곡식)을 팔도록 내몹니다. 흙일꾼 집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가르치자니, 흙일꾼은 자꾸자꾸 땅을 팔고 씨앗(곡식)을 팔아야 합니다. 스스로 지어서 먹던 씨앗은 조금 못생기거나 볼품이 없더라도, 집집마다 가장 맛나고 아름다웠지만, 내다 팔아야 하는 씨앗은 굵직하고 예뻐야 합니다.


  흙일꾼은 나날이 비료와 농약을 써야 합니다. 비료와 농약 없이 흙을 일구던 사람들이지만, 흙일꾼 집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니, 풀을 뽑거나 거름을 만들 일손이 모자랍니다. 시골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시골을 떠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노동자가 되고 보니, 이제 시골에는 늙은이만 남느라 비료와 농약 없이는 ‘씨앗(곡식) 내다 팔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시골 흙일꾼이 비료와 농약에 길들면서 ‘스스로 씨앗을 건사해 새로 심던 삶’이 무너집니다. 씨앗회사에서 씨앗을 돈 주고 삽니다. 더 굵고 더 예뻐 보이는 열매가 나는 씨앗을 사다 씁니다. 이제 ‘씨앗과 밥이 되는 목숨(씨앗)’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내다 팔기 좋아 보이는 열매’만 바라봅니다.


  시나브로 씨앗회사가 씨앗을 홀로 차지하면서 흙을 망가뜨립니다. 흙이 망가지니 비료를 더 써야 하고, 일손이 모자라니 농약을 더 써야 합니다. 흙은 자꾸자꾸 더 망가지고, 비료와 농약 장사는 더 불티나게 되면서, 씨앗회사는 조금씩 씨앗값을 올리며 떼돈을 법니다. 이동안, 시골 떠나 도시에서 새 보금자리를 튼 아이들이 다시 시골로 돌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도시로 간 시골 아이들이 늙은 어버이 일손을 거들러 시골로 찾아오는 일조차 없습니다.


  처음에는 씨앗 한 알이지만, 바야흐로 흙과 시골과 숲과 사람 모두 뒤흔들며 무너뜨리는 사회·정치·경제·교육 얼거리요, 씨앗회사입니다.


  사회는 돈만 바라보도록 내몹니다. 정치는 시골을 살피지 않습니다. 경제는 무역과 투자와 수출을 외칩니다. 교육은 ‘씨앗 심는 아이’로 이끌지 않습니다. 씨앗회사는 돈을 벌어들여 기쁘고, 정치권력은 값싼 일꾼(회사원과 공장노동자)을 시골에서 끌여들여 도시를 이루고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니 기쁩니다. 사회나 정치나 경제나 교육을 받친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톱니바퀴나 쳇바퀴 구실을 합니다. 연봉이 제법 높다거나 연금과 노후를 지켜 준다는 공공기관이라는 이름은 허울입니다. 시골 떠난 아이들이 도시에서 돈을 버는 동안, 시골마을 늙은 어버이는 허리가 휠 뿐더러, 시골마을 흙과 숲은 모두 망가질 뿐 아니라, 시골이나 도시에서 ‘밥(씨앗)을 먹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도 좋지도 맛나지도 않은’ 유전자 건드린 곡식을 먹어야 합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나 닭고기는 ‘유전자 건드린 곡식’으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화학약품으로 만든 항생제를 먹은 돼지와 소와 닭을 잡아서 공장에서 만듭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도시와 시골에서는 몸을 망가뜨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먹을거리로 넘칩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입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깨달은 슬기로운 사람은 숲에 깃들며 손으로 흙을 일굽니다.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알아챈 장사꾼은, 씨앗 유전자를 건드려 돈과 권력을 거머쥐며 사람들을 바보로 길들이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은 도시사람들이 ‘씨앗 한 알이 우주’인 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학교에서는 씨앗하고 동떨어진 교과서만 가르칩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영어에 온마음 바치도록 등을 밉니다. 중·고등학교 푸름이한테는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짓누르고,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일자리 찾는 데에 마음 사로잡히도록 울타리를 쌓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흙을 잊고 씨앗을 잃습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삶을 잊고 사랑을 잃습니다.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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