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님과 ‘우리 글 바로쓰기’
[말사랑·글꽃·삶빛 45] 말과 삶과 넋은 모두 하나

 


  나는 이오덕 님을 딱 두 번 뵈었습니다. 한 번은 1999년 2월 즈음이었지 싶습니다. 나는 1994년 12월에 ‘우리말 한누리’라는 이름으로 동아리를 하나 열어, 우리 말글 이야기를 꾸준히 쓰면서 조그마한 이야기책을 꾸몄습니다. 1995년 가을에 군대에 가서도 이야기책을 꾸몄습니다. 남들 자는 틈에 혼자 조용히 깨어 손으로 글을 써서 열 몇 쪽짜리 이야기책을 꾸몄어요. 휴가를 나오면 복사집에 들러 이야기책을 복사해서 둘레에 나누어 주었지요. 1998년에 사회로 돌아온 뒤에도 ‘우리 말글 이야기책’은 혼자서 씩씩하게 꾸몄습니다. 이즈음 이오덕 님은 과천에서 사셨고, 어떻게 이오덕 님 사는 곳을 알아서 편지로 내 작은 이야기책을 꾸준히 보냈습니다. 오래도록 내 이야기책을 받아보던 이오덕 님이 어느 날 저한테 전화를 걸어, “젊은이가 대견한 일을 하는데 우리 집에 한번 찾아와 보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몸이 힘들어 나를 보러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가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과천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는 벽이며 부엌이며 뒷간이며 수많은 책으로 빼곡합니다. 나는 이오덕 님 앞에서 두 시간 남짓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이가 대견한 일을 하기는 하되, 조금 더 생각할 대목이 있다며 찬찬히 짚어 주시는데, 부끄럽고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내가 쓰는 글에서 ‘가끔씩’은 겹말이니 틀린 말이라 ‘가끔’으로 바로잡아야 하고, ‘불린다’라는 낱말은 사람을 ‘부르는’ 자리 말고는 쓸 수 없으니 이 또한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밖에 더 길게 말씀했지만, 다른 이야기는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듬해 2000년 여름에 다시 한 번 뵙니다. 이때에는 먼발치에서만 바라봅니다. 이오덕 님을 처음 뵌 자리에서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러 줘》라는 책과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라는 책 두 가지를 선물로 받았는데, 나는 바로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일꾼으로 들어갔어요. 출판사 일꾼 모두 한국글쓰기연구회 여름모임에 함께하느라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 갔고, 강의 하는 자리에서 가만히 당신 말씀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 뒤 나는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합니다. 2001년 1월 1일부터 이 일을 하다가 2003년 8월 31일에 그만두었어요. 이오덕 님은 2003년 8월 25일에 돌아가셨지요. 어린이 국어사전 만들기는 내 오랜 꿈이었지만, 출판사 흐름과 제 뜻이 안 맞아 그만 꿈을 접어야 했는데, 회사 그만둘 즈음 이오덕 님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기운이 한풀 더 꺾였습니다. 내 몫을 다른 이한테 물려주도록 ‘인수인계 서류’를 꾸미는 틈틈이 ‘이오덕 님 기리는 글’을 썼어요. 하루에 한 꼭지씩 원고지로 치면 40∼50장쯤 되는 글을 다섯 꼭지 썼어요. 그러고는 출판사는 그만두고 홀로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나날을 보냈지요. 아프고 슬픈 마음을 달래려고 전화기는 끄고 살았어요. 한 달 즈음 전화기 없이 지내다가 어느 곳에 전화할 일이 있어 퍽 오랜만에 켜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어요. 왜 그동안 전화가 안 되었느냐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하는가 싶었는데, 뜻밖에 이오덕 님 큰아들이었습니다. 이오덕 님 큰아들은 제 아버지하고 비슷한 또래입니다. 큰아들 되는 분은 당신 아버님을 흙에 묻은 뒤 여러모로 ‘추모글’을 찾아서 읽다가 내가 쓴 기나긴 글을 읽으셨다는데, 당신 아버님을 잘 헤아리는구나 싶어 만나고 싶다 하셨어요. 한 주쯤 망설이다가 충북 충주로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저더러 “아버지 원고와 책을 자네가 정리해 주면 좋겠는데.” 하고 말씀했어요. “원고와 책 정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런 일은 제가 늘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정리를 하자면 적어도 세 해는 걸려요. 세 해 동안 아무것(원고를 정리한 결과물인 책)도 안 나올 수 있어요.” “삼 년이면 될까?” “세 해 동안 꼬박 붙어서 하면 되지요.” “그럼 진짜로 해 볼래요?” “다만, 저는 서울에 집이 있으니까 서울 오가는 찻삯은 주시면 좋겠어요.” “차비야 주지. 인건비도 주어야지.” “아니에요. 저는 인건비는 바라지 않아요. 돌아가신 선생님 원고와 책을 정리하는 일로도 저한테는 큰 공부가 되는걸요.”


  나는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이고, 출판사에서 국어사전 기획·편집자로 일하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경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오덕 님 기리는 글’ 다섯 꼭지를 먼저 알아보시고는 나를 믿고 당신 아버님 글과 책을 맡기셨어요. 그래서 나는 2003년 9월부터 이오덕 님 남긴 글과 책에 파묻혔습니다. 주마다 사나흘씩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 멧골집에 머물면서 먼지덩이와 씨름했습니다. 이오덕 님 돌아가신 집은 마을이름 ‘무너미’에서 알 수 있듯 물이 많아요. 이오덕 님 계시던 돌집도 물기가 많아 벽이 온통 새까만 곰팡이였어요. 곰팡이 낀 책을 닦고 털며 햇볕에 말립니다. 곰팡이 기운 퍼지는 원고도 닦고 털며 햇볕에 말립니다. 하도 먼지가 많아 물안경이랑 입가리개를 한 채 일했어요. 일하다가 힘들면 이오덕 님이 드러누워 주무셨다는 침대에 나도 가만히 누워서 생각에 잠겼어요. 어떤 넋과 얼로 이 시골집에서 숱한 이야기를 길어올리셨을까 하고 떠올렸어요. 나는 어떤 인연으로 이오덕 님과 이렇게 ‘글·책’으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까 하고 돌아보았어요.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 돌집에서 먼지덩이에 파묻혀 글과 책을 살피기 앞서까지, 나는 내 깜냥껏 이오덕 님 책을 많이 읽고 갖추었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못 보고 모르던 책이 제법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는 원고지와 공책과 책하고 씨름을 합니다. 새벽과 밥때에는 ‘아직 못 읽은’ 이오덕 님 책을 읽으며 지냅니다. 책으로 나온 원고를 한쪽으로 모읍니다. 책으로 안 나온 원고를 다른 한쪽으로 모읍니다. 신문과 잡지를 샅샅이 훑어 책에 안 실린 글을 따로 추립니다. 이동안 권정생 님 글 실린 잡지와 신문을 따로 모았고, 이 글은 나중에 《죽을 먹어도》라는 작은 책으로 태어났어요.


  수많은 원고더미 사이에 파묻힌 어느 과일상자에서 이오덕 님 일기가 한 꾸러미 나왔습니다. 얼추 여섯 달 즈음 글과 책을 갈무리하던 때였지 싶어요. 곰팡이 먹는 책을 하나하나 닦고 손질하며 해바라기를 시키던 때인데, 한참 책더미 파고들어 닦다가 만난 상자에서 드디어 이오덕 님 일기장이 나타났어요. 그러고 몇 달 지나서, 이오덕 님이 ‘이원수 님 시에 손수 가락을 붙인’ 악보가 나왔어요. 1960∼70년대에 이원수 님 동요가 널리 나오기는 했지만, 더없이 아름답다 할 동시에 아직 가락이 붙지 못하고, 또 가락이 붙었어도 썩 부를 만하지 못하다 싶은 몇 가지 동시에, 이오덕 님이 손수 가락을 입히셨더군요. 그러고 또 몇 달 지나, 이오덕 님이 경상도 멧골자락에서 멧골아이를 가르치며 손수 등사를 밀어 만든 ‘학교신문’ 꾸러미를 찾습니다.


  이오덕 님 글과 책 갈무리는 두 해 반쯤 될 무렵 모두 마칩니다. 그 뒤 한 해를 더 충북 충주 멧골집에 머물며 이오덕 님 옛글이 새로 빛을 보도록 일합니다. 이오덕 님이 《우리 글 바로쓰기》에 이어 마무리지으려 하셨던 《우리 말 살려쓰기》는 세 권으로 엮어서 내놓았습니다. 다만, 아쉽다면, 이오덕 님이 《우리 말 살려쓰기》 다음으로 내놓고 싶으셨던 ‘우리 말 바로쓰기 사전’까지는 내 손으로 마무리짓지 못했어요. 글과 책 갈무리하는 일은 세 해면 된다고 여겼지만, “우리 말 바로쓰기 사전”을 엮자면 적어도 열 해는 걸리리라 느꼈어요.


  무너미마을 멧골집에서 일을 끝내고 내 고향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고향마을에서는 지자체 공무원이 막개발 일삼으며 살가운 골목마을 이웃들 삶터를 짓밟으려 했어요. 나는 고향마을 인천으로 돌아가서 내 책들을 밑천 삼아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어요. 내가 마음 기울여 하는 일은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살찌우는’ 일인데, 한국말 자료를 찾으려고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었고,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며 헌책방 사진도 찍고 헌책방 이야기도 글로 쓰는데, 이렁저렁 하는 동안 시나브로 ‘사진책’이 많이 모이더군요. 그래서 ‘우리말도서관’ 아닌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어요. 내 사진책도서관에는 온갖 국어사전과 한국말 자료를 이천 가지 즈음 갖추었습니다. 이 자료는 나 스스로 앞으로 ‘한국말 사전’이나 ‘한국말 살려쓰기 사전’ 엮을 밑책 노릇을 하리라 생각해요.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3년에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1989)라는 책을 처음 알아보았어요. 이때부터 이 책을 틈틈이 되읽어요. 요즈음 이 책을 되읽다가 1권 328쪽에서 다음 같은 대목을 천천히 다시 밑줄 그으며 읽었어요. “지식인들의 말과 글이 백성들의 말이 아니고 남의 말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남의 것, 즉 백성들 속에 살면서 그 삶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 책에서 얻은 지식이요 관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지식이나 관념만으로 자기의 관점을 세워 나갈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책에서 얻은 사상은 자기의 삶에서 몸으로 가지게 된 생각과 하나로 될 때 비로소 그 사상은 제것으로 되지요. 제것은 없고 지식만 가지고 제것인 양 여긴다면 그것이 문젭니다. 말은 잘못되었는데 생각만은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 시를 쓰는 사람이든지 소설을 쓰는 사람이든지, 우리 말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하는 몸가짐이 없이는 옳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처음부터 한국말을 가다듬거나 살찌우거나 다스리는 길을 걸을 뜻이 있지는 않았어요. 이오덕 님 책에서 이 대목을 읽을 적에도 내가 오늘 같은 길을 걸으리라고는 느끼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대목은 내 생각을 크게 흔들었어요. 이오덕 님 말씀은 아주 쉽거든요. ‘말 = 삶’이란 이야기예요. 말에 이녁 삶이 모두 드러난다는 이야기예요. 말을 올바로 쓰지 않고서는 삶이 올바로 서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참말 그런가? 참말 그와 같을까? 두고두고 생각합니다. 두고두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면서 늘 깨닫습니다. 참 그렇구나. 말이 번드르르한 사람은 삶 또한 번드르르합니다. 알맹이는 없지요. 말이 수수한 사람은 삶 또한 수수합니다. 알맹이가 야무집니다. 말을 곱게 하는 사람은 차림새도 곱습니다. 어떤 값진 옷을 입어서 곱지 않아요. 정갈한 마음이 정갈한 말에 드러나고, 정갈한 낯빛과 몸빛으로 드러나더군요.


  말만 그럴듯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은 참말 말도 삶도 그럴듯합니다.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는 모습이 아닌 ‘그럴듯하다’는 모습입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을 내놓기 앞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라는 책을 내놓았어요. 책이름부터 환히 드러나지요. 삶을 가꾸는 글(말)이어야 하고, 글(말)을 가꾸면서 삶을 가꾸어야 아름답다는 이야기예요. 우리 글을 바르게 쓰자는 이야기는 우리 삶을 바르게 일구자는 이야기예요. 삶을 바르게 일구지 않고서는 말을 바르게 일구지 못해요. 참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말글 바르게 쓰기가 어렵다’고 얘기하는데, 왜 어려운가 하면, 당신 삶부터 바르게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당신 삶부터 바르게 고치는 나날을 즐거이 누리는 분들은 ‘우리 말글 바르게 쓰기’도 수월하게 하지요. 즐겁게 합니다. 익산에 사는 여든 살 할머니 한 분이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를 몸소 즐겁게 펼쳐 보이시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익산 할머니 그분은 ‘삶 바로세우기’부터 늘 즐겁게 하셔요. 삶이 바로서니까 말 또한 저절로 바르게 서요. 삶을 바로세우니 넋도 찬찬히 바르게 섭니다.


  말과 삶과 넋은 모두 하나입니다.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말만 앞세울 때에는 삶이나 넋 모두 겉치레가 됩니다. 말을 알차게 가다듬을 때에는 삶이나 넋 모두 알차게 가다듬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 모두 말·삶·넋을 아름다이 일굴 수 있기를 빌어요. 말·삶·넋을 아름다이 일굴 때에는 이 땅이 아름답게 거듭나거든요. 말·삶·넋을 사랑스레 돌볼 때에는 이 나라가 사랑스레 거듭나요. 말·삶·넋을 착하게 보듬을 때에는 이 겨레가 착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요.


  말과 글을 바르게 쓰자는 소리, 또 말과 글을 살려서 쓰자는 소리는, 말과 글에만 얽히는 소리일 수 없습니다. 말부터 정갈히 건사하면서 넋을 정갈히 건사하려는 몸짓입니다. 말과 넋을 정갈히 건사하면서 삶을 정갈히 북돋우려는 몸가짐입니다.  사랑과 꿈과 이야기를 우리 모두 아름다이 아끼면서 믿음과 빛과 웃음을 서로서로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된 길에 설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전라남도 고흥 두멧시골에서 옆지기와 두 아이와 오붓하게 지내며 꿈꿉니다. 나는 이 두멧시골에서 조용히 말삶과 책삶을 밝히고, 내가 밝히는 삶자락은 아이들 꿈날개로 이어져 온누리에 곱게 흐드러지기를 꿈꿉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며 쓰는 글은 ‘말사랑’이고 ‘글꽃’이며 ‘삶빛’입니다. 4346.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국어사전 뒤집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