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박또박 책읽기

 


  집안일 하고, 자전거에 아이들 태워 마실 다녀오고, 이래저래 글쓰기를 하다 보면, 해 기울고 어두운 저녁나절에 몸에서 힘이 쪼옥 빠진다. 일찌감치 드러눕고 싶은데, 아이들은 잠들 생각을 않으면, 나도 섣불리 자리에 눕지 못한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때 큰아이가 빈책을 펼쳐 글씨쓰기 함께하자고 하면, 미리 종이에 또박또박 적은 글판을 내민다.


  큰아이는 글판에 적힌 글을 보며 따라 적는 일은 그리 내키지 않는 듯하다. 그래도, 너 혼자서 이 글판 보고 글씨쓰기를 놀이 삼아 즐길 수 있잖니. 큰아이는 빈책에 내가 먼저 한 줄을 천천히 또박또박 적으며 읽어 주기를 바란다. 내가 몸이 힘들어서 글판을 내밀기는 했지만, 나도 한 줄씩 새 말마디를 생각해서 또박또박 적으며 하나하나 읽어 주면 한결 즐겁다. 고운 낱말을 내 혀로 굴리고, 고운 낱말을 내 눈으로 보며, 고운 낱말을 내 손으로 적바림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새 기운이 솟는다.


  어떤 말을 어떻게 나누려는 삶일까. 어떤 글을 어떻게 빚으려는 삶일까. 어떤 사랑을 어떻게 꿈꾸려는 삶일까. 큰아이는 어버이가 쓰는 글씨대로 제 글씨를 가다듬는다. 어버이로서 또박또박 적바림하는 글씨가 아니라면, 아이도 아무렇게나 흘려쓸밖에 없다. 나 스스로 온누리를 맑고 밝게 사랑한다면, 나부터 즐거우면서 아이한테도 맑고 밝은 사랑이 시나브로 깃든다. 한 마디 말이 씨앗이다.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