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다움’과 ‘소녀적’과 ‘소녀틱’
[말사랑·글꽃·삶빛 46] 어른답게 쓸 말을 생각한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동안 영어를 쓸 일은 딱히 없습니다. 집에서 살림을 꾸리며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영어를 쓸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면내나 읍내로 마실을 나가 저잣거리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동안 영어를 쓸 일은 따로 없습니다. 오늘 하루 지낸 이야기를 내 일기장에 천천히 연필로 적으면서 영어를 쓸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볼일을 보러 갈라치면, 버스표나 기차표를 파는 곳부터 영어를 듣습니다. 요사이는 ‘표’라는 말보다 ‘티켓’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 듯합니다. 버스나 기차에서 먹으려고 빵집을 찾아보면, 빵집 이름은 으레 알파벳으로 적히고, 빵집에 놓인 빵 또한 알파벳 이름이나 영어 이름이 붙습니다. 새벽버스나 새벽기차를 타며 편의점을 찾아보아도, 편의점 간판은 몽땅 알파벳투성이입니다.


  도시에서 만나는 분들은 으레 말마디에 영어를 섞습니다. 도시에서 타는 버스나 전철에는 영어 이름이 붙습니다. 도시 한복판 길거리 가게들은 온통 영어 이름이요, 사람들이 입는 옷에 붙는 이름도 영어요, 사람들이 손에 쥔 전화기 또한 모조리 영어 이름입니다.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서는 영어를 높이 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영어 학원을 다니거나 영어 교재를 장만해서 익히려 합니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나들이를 간다면 영어쯤 할 수 있어야겠지요. 따로 미국이나 영국을 좋아하는 이라면, 영어로 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수 있겠지요. 다른 나라로 볼일 보러 자주 나가야 하는 회사원이라면 영어를 제법 잘 말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이런 자리 저런 사람 빼고는, 누가 왜 영어를 써야 할까요. 아니, 영어는 어느 자리에 어떻게 써야 할까요. 빵집은 왜 영어를 써야 할까요. ‘패밀리 레스토랑’은 왜 영어를 써야 할까요. 돼지고기를 튀겨서 판다는 ‘돈까스’집은 일본말을 써야 멋스러울까요. 짜장면 파는 집은 중국말이나 한자를 써야 돋보일까요.


  일본사람 요시나가 후미 님 만화책 《사랑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서울문화사,2005)를 보다가, 141쪽에서 “연애가 하고 싶다든가 하는 건 소녀틱하고 귀엽지만” 하는 말마디에 눈길이 멎습니다. ‘소녀답고’도 아니요 ‘소녀적(-的)’조차 아닌 ‘소녀틱(-tic)’이라고 번역을 했군요. 아마, 일본책에는 ‘少女tic’처럼 적혔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 말투 그대로 한글로 적어 ‘소녀틱’처럼 옮겼을는지 몰라요.


  일본책은 일본사람이 보라고 만듭니다. 이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려 한다면, 일본사람 아닌 한국사람이 보라고 만드는 셈입니다. 곧, 한국사람이 볼 책이라면 한국말로 적어야겠지요. 껍데기만 한글인 말이 아니라, 속알맹이 아름다운 한국말로 적어야 올바르겠지요.


  한국사람은 예부터 어떤 말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았을까 하고 떠올려 봅니다. “소녀처럼 귀엽지만”, “소녀같이 귀엽지만”, “소녀답게 귀엽지만”, “소녀다이 귀엽지만”, “소녀인 양 귀엽지만”, “소녀인 듯 귀엽지만”, “소녀와 같아 귀엽지만”, …… 이런 말 저런 말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러나,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이런 말 저런 말 가운데 어느 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이 번역책 읽을 한국사람은 저절로 ‘소녀틱’이라는 낱말을 읽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재미있다 여겨 즐겨쓰는 사람이 있을 테며, 뭐 이런 번역이 다 있담 하며 눈살 찌푸리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놀랍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환상적(幻想的)이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판타스틱()!’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쓰는 말이 다를 테니, 어느 말을 쓰든 무어라 따질 수 없습니다. 다만, 시골사람은 ‘놀랍네!’ 하고 말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환상적이네!’ 하고 말할 일도 없지만, ‘판타스틱!’ 같은 말을 할 까닭도 없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또 인터넷이나 손전화로, 수없이 많은 말이 떠돌고 흐르며 춤춥니다. 신문은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만들까요. 방송은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만들까요. 인터넷이나 손전화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자주 쓰거나 많이 쓸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떤 말을 어느 곳에서 들으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랄까요.


  아이들한테 신문이나 방송을 보여주기 몹시 꺼림칙합니다. 싱그러이 숨쉬는 말은 신문이나 방송에 좀처럼 안 나오는구나 싶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나 손전화도 이와 비슷해요. 푸르게 빛나는 말이 인터넷이나 손전화에 떠도는 일은 매우 드물어요. 아이들한테 읽힐 그림책이나 동화책도, 작가나 편집자가 한국말을 더 슬기롭게 살피거나 아름답게 매만지지 못하기 일쑤예요. 집에서 아이들하고 그림책을 함께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히곤 합니다. 아이들 눈높이와 어울리지 않는 낱말이 그림책에 너무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이들 넋과 사랑을 북돋우기에 모자란 말투마저 자주 나와요.


  어른들이 ‘세 나라 말’을 쓰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도 ‘세 나라 말’을 쓰도록 길들여지는구나 싶습니다. 어른들이 ‘세 나라 말’ 아닌 사랑스러운 말을 쓰는 한국 사회라면, 아이들도 ‘세 나라 말’ 아닌 사랑스러운 말을 쓰겠지요.


  밤이 깊습니다. 어린 두 아이한테 자장노래 곱게 불러 줍니다. 한 아이씩 새근새근 잠듭니다. 아이들 아버지로서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낱말로 엮는 자장노래를 가장 보드랍고 따스한 목소리를 뽑아서 부르면, 아이들도 환한 얼굴로 노래를 들으며 잠들고, 아버지인 나도 노래를 부르며 얼굴이 환해서 즐겁습니다. 아이들한테 가장 맑고 맛난 밥을 먹이고 싶듯, 아이들이랑 가장 정갈하고 싱그러운 밥을 나누고 싶듯, 나부터 가장 맑고 사랑스러운 말을 쓰고 싶으며, 나 스스로 가장 정갈하고 고운 말을 쓰고 싶습니다. 영어를 쓴대서 안 깨끗하거나 안 사랑스러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지 모르나, 나는 내 어버이가 나를 사랑하면서 물려준 말을 쓰고 싶어요. 내 어버이가 어릴 적 당신 어버이가 당신한테 물려준 말을 쓰고 싶어요. 먼먼 옛날부터 이 나라 어버이가 이 나라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며 들려준 가장 사랑스럽고 해맑은 말을 살찌우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해맑게 자랄 수 있도록 활짝 웃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4345.12.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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