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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꽃 붉은 그 길 ㅣ 신생시선 4
윤상운 지음 / 신생(전망)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밤에 꽃을 보다
[시를 노래하는 시 38] 윤상운, 《배롱꽃 붉은 그 길》
- 책이름 : 배롱꽃 붉은 그 길
- 글 : 윤상운
- 펴낸곳 : 신생 (2006.12.25.)
- 책값 : 6000원
언제나 좋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좋은 마음이 바로 ‘책’이고 ‘신문’이며 ‘글’이 된다고 느껴요. 스스로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면, 제아무리 이름나거나 훌륭하다 하는 책을 손에 쥐더라도 사랑스레 읽지 못하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스스로 좋은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책 하나를 살포시 품으면서 이야기꽃을 누릴 수 있어요.
언제나 좋은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들판에 흐드러지는 크고작은 들꽃을 알아봅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이 아닐 적에는, 들판 아닌 꽃밭에 서더라도 크고작은 꽃들이 얼마나 곱게 얼크러지는가를 살피지 못해요. 마음가짐에 따라 눈썰미가 달라져요. 마음그릇에 따라 눈매가 바뀌어요.
한국에도 아름다운 숲이 곳곳에 있지만, 스스로 어떤 일에 치이거나 바쁠 때에눈 숲내음을 맡지 못하기도 하지만, 숲으로 나들이를 가지 못합니다. 애써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두멧시골’ 같은 나라로 찾아가서야 비로소 드넓은 들판과 숲과 하늘을 만나려고 해요.
..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 가로수 밑에서 너를 만났다 / 먼지를 뒤집어 쓴 네 모습이 안쓰러워 / 너에게 다가서자 / 너는 예쁜 모습으로 변해 나를 보았다. / 그 이후로 나는 딸에게 말하는 법을 / 새로 배웠다 .. (패랭이꽃에게)
스스로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에, 아름다움이 찾아옵니다.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못하면 아름다운 일이 찾아오지 않아요. 스스로 이것저것 어두운 무엇인가 걱정한다면, 어두운 무엇인가 자꾸 찾아옵니다. 어두운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씩씩하게 일구면, 우리 둘레에 어두움이 깃들 자리가 없어요. 늘 즐거운 꿈 꾸는 삶이 돼요.
웃는 사람은 웃습니다. 웃음꽃 피우는 사람은 웃음꽃 누립니다. 웃음열매 맺는 사람은 웃음열매 나누어 줍니다.
우는 사람은 웁니다. 울음꽃 피우는 사람은 울음꽃에 젖어듭니다. 울음열매 맺는 사람은 둘레에 울음열매를 퍼뜨려요.
생각이 곧 삶입니다. 삶은 다시 생각이 됩니다. 어떤 삶을 누리고 싶은지 찬찬히 생각할 노릇입니다. 스스로 누리고 싶은 삶을 언제나 즐겁게 생각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삶’을 누리려면 ‘내가 오늘 이곳에서 어떤 일을 어떤 몸가짐으로 하면 되는가’ 하는 길을 찾을 노릇입니다.
.. 모든 소리에 먹물을 끼얹은 듯 / 산이 온통 조용하고 깜깜한 밤이 있다 .. (반딧불)
밤에 꽃을 봅니다. 마음속에 꽃 한 송이 품고 지내니, 밤에 꽃을 봅니다. 어느 꽃은 밤에 꽃잎을 살며시 닫습니다. 어느 꽃은 밤에도 꽃잎을 안 닫습니다. 어느 꽃은 밤에 꽃잎을 가만히 벌립니다.
논둑에 쪼그려앉아 들풀 사이사이 소담스레 피어난 들꽃을 바라봅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까만 하늘 하얗게 빛내는 별을 올려다봅니다. 땅에는 들꽃이요, 하늘에는 별꽃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꽃입니다.
들꽃은 들바람을 마시며 들꽃내음을 나누어 줍니다. 별꽃은 별바람 되어 지구별로 드리웁니다. 아이들은 사랑바람과 같이 나를 감돌면서 마음밭에 예쁜 씨앗으로 안깁니다.
.. 가을비 한번씩 내릴 때마다 / 숲은 점점 고요해지고 / 무밭이며 강둑에 서리꽃 하얗다 .. (가는 가을)
윤상운 님 시집 《배롱꽃 붉은 그 길》(신생,2006)을 읽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낮이고 밤이고 꽃을 봅니다. 나는 시골에서고 도시에서고 꽃을 봅니다. 나는 우리 아이한테서고 옆지기한테서고 이웃한테서고 꽃을 봅니다. 꽃은 언제나 꽃답게 피어 찾아옵니다. 꽃은 어디에서나 꽃내음 풍기며 마음을 적십니다. 꽃은 늘 꽃빛 되어 눈을 밝힙니다.
.. 진달래 꽃이 피었습니다 / 복사 꽃이 피었습니다 / 박태기 꽃이 피었습니다 / 이름 아는 이쁜 것은 다 / 피었습니다 / 당신의 눈에 피었습니다 / 당신의 가슴에 피었습니다 .. (꽃)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에는 후박나무가 많습니다. 언제부터 후박나무가 고흥에서 많이 자랐는지 잘 모르지만, 후박나무가 고흥에 퍽 많습니다. 이곳을 가도 저곳을 가도, 멧골에 가도 바닷가에 가도, 후박나무는 들바람과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햇볕과 햇살을 머금으며, 푸르게 푸르게 자라며 나뭇가지를 뻗습니다.
후박나무는 겨울 어귀에 자그맣게 몽우리를 냅니다. 몽우리는 추운 겨울 씩씩하게 견디며 한결 단단해지고, 새봄 찾아와 따순 날 이어지면 아주 천천히 봉오리를 벌립니다.
후박꽃 봉오리는 한꺼번에 터지지 않습니다. 보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열립니다. 그리고, 열린 봉오리에서 작은 꽃망울이 저마다 따로따로 작디작은 꽃잎을 벌려요. 꽃잎 또한 아주 천천히 벌려요. 후박꽃이 소담스레 흐드러지는 모습을 보자면, 봉오리가 막 벌어지려 할 때부터 얼추 한 달을 기다립니다.
.. 담에 핀 별을 닮은 호박꽃이 나를 불러 그 곁에 서자 어린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고 가슴이 따뜻해왔다 .. (오해에서 벗어나다)
갓난쟁이는 돌 무렵에 서기도 하지만, 두 돌 즈음 되어 서기도 합니다. 아이는 일찍 말문을 열기도 하지만 서너 살 때까지 말문을 안 열기도 합니다.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다섯 해 열 해 열다섯 해 튼튼하게 자랍니다. 푸른 넋을 가슴에 품으며 몸이랑 마음이 나란히 자랍니다.
하루아침에 피어나는 후박꽃 아니듯, 하루아침에 ‘어른 되는’ 어린이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저마다 마음밭에 고운 삶씨·사랑씨·꿈씨·믿음씨를 심어서 돌봅니다. 삶씨와 사랑씨와 꿈씨와 믿음씨가, 여기에 생각씨와 이야기씨와 웃음씨와 눈물씨까지 골고루 보살피면서 하루하루 누립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하고 어떤 씨앗을 우리 텃밭에 심어 예쁘게 보살피는 어버이일까요. 나는 내 어버이하고 어떤 씨앗을 내 보금자리에 심어 예쁘게 보살피던 아이였을까요.
아이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듯, 내 가슴에서 피어날 꽃을 봅니다. 살가운 동무들 가슴에서 피어나려는 꽃을 봅니다. 내가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이웃들 가슴에서 피어날 꽃을 봅니다.
누구나 가슴에 꽃을 품습니다. 누구나 가슴에 씨앗 한 알 있습니다. 누구나 가슴에서 이야기 한 자락 샘솟습니다.
.. 이름 모를 들꽃들은 / 이름을 몰라도 아름답다 .. (들꽃)
하늘이 파랗습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이 좋습니다. 바람이 싱그럽습니다. 싱그럽게 흐르는 바람이 좋습니다.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좋습니다.
추운 겨울 이기고 새봄 기다리는 들풀이 골골샅샅 웅크리며 힘을 모읍니다. 작은아이 큰아이 내 무릎을 갈마들며 낮잠을 잡니다. 무릎이 남아나지 않겠네 싶지만, 막상 두 아이를 무릎에 갈마들어 누이고 보면, 나날이 무릎이 튼튼해지기도 하는구나 싶습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면소재지나 읍내로 마실을 다니고 보면, 나이 마흔 살에도 허벅지는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거든요.
내가 품을 좋은 마음을 떠올립니다. 내가 아낄 좋은 생각을 보듬습니다. 내가 즐길 좋은 사랑을 두 손길에 담아 기쁘게 나누어 줍니다. 4345.12.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1229/pimg_70517512481101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