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무인도)에 가져갈 책
벌써 열 해는 지난 일 같은데, 어느 방송사에서 나를 취재하러 왔을 때에 “무인도에 가시면 어떤 책을 가져가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이때 나는 참 어이없는 이야기를 묻는구나 싶었다. 취재를 나온다면, 취재를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조금이나마 살펴야 할 노릇 아닌가. 내가 쓴 글이나 내가 낸 책을 읽었으면, 내가 어떻게 생각하며 삶을 일구려 하는가를 살짝이나마 짚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 물음을 들으면서 곧바로 떠오른 생각은, 취재를 하기 앞서 어느 한 사람을 알아보려고 그이가 쓴 글이나 낸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면서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식이나 정보는 얻을는지라도, 넋이나 얼은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고는 대꾸한다. “저는 아무 책도 안 가져갈 생각이에요. 그 섬이 바로 나한테는 책이 될 테니까요. 섬에서 살아가며 누릴 이야기로 이 지구별에 꼭 하나만 있으면서, 내가 새롭게 누릴 책을 몸으로 쓰고 마음으로 새겨야지요.” 연필은 가져가겠느냐, 공책은 가져가겠느냐 하고도 물었던가 모르겠다. 글쎄,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겠지. 그런데, 텅 빈 종이꾸러미와 연필을 가져간달지라도, 몇 쪽을 쓰고는 더 쓸이 없으리라고 느낀다. 하루하루 새롭게 누리는 삶을 적기에는 두툼한 공책 수백 권으로도 모자랄 뿐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쓰느라 막상 외딴섬 사랑스러운 삶을 덜 누릴 수밖에 없다. 외딴섬에 간다는 뜻은, 외롭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홀로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뜻이니까, 종이에 삶을 적바림해서 이야기를 남길 까닭 없이, 내 마음에 이야기를 아로새겨서, 내 입과 눈과 몸과 손으로 누군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 넉넉하다. 그러니까, 여느 섬으로 마실을 간다든지, 여느 이웃마을로 나들이를 간다면, 이때에는 공책이랑 연필을 꼭 챙긴다. 이웃마을 둘러보며 누린 아름다움을 글로 정갈히 건사해서 내 ‘글동무’랑 ‘글이웃’하고 알콩달콩 웃음으로 나누면 즐거우니까. 4345.12.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