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디 갔니?

 


  아버지인 내가 두 아이를 홀로 건사하며 마실을 다니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어김없이 “어머니 어디 갔어요?” 하고 묻는다. 어느 어른은 아이를 바라보며 “엄마 어디 갔니?” 하고 묻기까지 한다. 이럴 때, 이렇게 묻는 이들이 나로서는 참 ‘버릇없다’고 느낀다. 아버지가 두 아이를 잘 건사하며 다니는데, 아이들이 ‘버릇없는 말’을 뻔히 듣는다면, 아이 삶에 어떤 넋이 흘러들겠는가. 그래서 나는 두 아이와 함께 읍내나 면내에조차 마실을 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예쁜 사람들은 이런 버릇없는 말로 우리 식구를 맞이하지 않지만, 예쁜 넋으로 예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으레 버릇없는 말로 이녁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참말 어머니가 어디 갔으면 어떤가. 더구나 ‘이녁은 모르는 일’이지만, 아이들한테 어머니 없이 아버지 혼자 아이들을 맡아서 살아간다며 어떠하겠는가. 어머니 없는 아이들 앞에서 “어머니 어디 갔어요?” 하고 묻는 말이란 ‘아픈 생채기’를 후벼파는 셈 아닌가?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도 했으며, 소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성 차별’을 느끼도록 북돋우는 엉터리 같은 말이 함부로 터져나오지 않도록 사람들 스스로 이녁 삶을 슬기롭게 다스릴 노릇이다. 아이들이 ‘아픔과 슬픔’을 받도록 부추기는 멍텅구리 말은 아무 데서나 새어나오지 않도록 사람들 스스로 이녁 삶을 올바로 추스를 노릇이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 아버지가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보살피는 몫까지 으레 도맡는다. 어느 모로 바라보더라도 ‘아무런 성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우리 식구 같은 모습을 보기는 아주 힘들리라. 평등이니 평화이니 하는 말에 앞서, 아이는 두 어버이가 함께 사랑하며 돌볼 노릇이요, 집안일이건 집밖일이건 두 어버이가 씩씩하게 맡을 노릇이다. ‘어머니만 아이들을 도맡아서 보살펴야’ 하지 않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집일을 더 많이 맡거나 아이들을 더 오래 맡아서 보살펴야’ 하지도 않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할 몫이고, 어버이라면 즐겁게 누릴 몫이다.


  삶을 읽고 사람을 읽으며 사랑을 읽을 때에 생각을 열 수 있다. 삶을 쓰고 사람을 쓰며 사랑을 쓸 때에 마음을 열 수 있다. 삶을 읽는 예쁜 이웃을 만나고 싶다. 사람을 읽는 고운 동무를 만나고 싶다. 사랑을 읽는 눈빛 맑은 사람과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고 싶다. 4345.1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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