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3] 살림읽기
― 스무 해쯤 밥돌이로 살며

 


  나는 어느새 스무 해쯤 밥돌이로 살아갑니다. 그동안 지은 밥은 얼마나 많을까 어림해 봅니다. 여태껏 밥을 슬기롭게 짓거나 훌륭히 지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짓는 밥은 내가 먹거나 손님한테 차리거나 아이들한테 내주거나, 참으로 맛있다고 느낍니다. 이제 나는 내 어버이한테 밥을 즐겁게 차려서 올릴 수 있습니다.


  이제껏 기나긴 해를 돌고 돌아 이렇게 밥을 차릴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내 어버이가 나한테 밥·옷·집을 스스로 건사하는 삶을 물려주었으면, 스무 해를 빙 에둘러 밥돌이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어버이가 내 어릴 적부터 나한테 밥·옷·집을 알뜰히 보여주며 물려주었으면 나는 열다섯이나 스물 나이부터 즐거이 밥을 차릴 줄 아는 밥돌이 삶을 누렸으리라 생각해요.


  아침저녁으로 두 끼니 차리는 밥삶을 떠올립니다. 나는 세 끼니를 차리지 않습니다. 세 끼니를 먹자면 배가 더부룩해서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말에는 ‘낮밥’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한자말로 ‘점심’이라는 낱말이 어느 때부터 슬그머니 스며들었지만, 한국사람 한국살이에는 낮에 먹는 밥이 없어요. 곧, 아침에 먹어 아침밥이고 저녁에 먹어 저녁밥일 뿐, 오래도록 한겨레는 두 끼니 밥차림으로 지냈어요.


  사이에 배가 출출하면 샛밥을 먹습니다. 샛밥이란 ‘참’이라고도 했고 ‘새참’이라고도 일컫습니다. 곧, 들에서 일하며 들밥을 샛밥으로 먹는데, 이러한 밥은 낮에 먹는 밥이라 할 만해요. 이렇게 따지자면 세 끼니를 먹은 셈이라 여길 텐데, 한겨레는 샛밥은 끼니로 넣지 않아요. 이름 그대로 ‘샛’밥, 사이에 배를 채워 일할 기운을 북돋우는 주전부리로 여겨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아침-아침밥’과 ‘저녁-저녁밥’이라는 말 얼거리를 배운 적 없습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이 같은 말 얼거리를 배우지 못합니다. 나 혼자 생각하며 느꼈고, 홀살이를 퍽 길게 하면서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이제 두 아이 어버이로 살아가며 더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나 혼자 물어 봅니다. 왜 오늘날 어버이들은 하나같이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모조리 ‘아이들을 시험공부 생체기계가 되도록 들볶거나 등을 떠미’는 짓을 하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서울에서든 시골에서든, 아이 낳아 돌보는 어버이 가운데, 어버이 나이가 되도록 ‘어버이다운 삶’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배운 이는 아주 드뭅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이든, 대학교 네 해이든, 어느 학교에서도 아이들한테 ‘너희는 앞으로 어버이로 살아갈 테니, 어버이 삶이란 무엇인지 몸소 느끼고 배우렴’ 하고 이야기를 들려준 어른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은 중학교 즈음 비로소 성교육이라고 배우고는, 고등학교 마칠 무렵 살곶이를 즐기고, ‘어른(성인)’이 되었다고 할 때에 시집장가를 가며 아이를 낳아요. 그런데, 막상 아이낳기가 무엇인지 배운 적 없고, 아이를 어떻게 낳고, 낳은 아이는 어떻게 사랑하며, 아이를 사랑하는 삶은 어떻게 일구어야, 나 스스로 즐거운 나날이 되는가를 몰라요.


  오늘날 어버이는 스스로 삶을 모르고 못 즐기며 안 사랑합니다. 오늘날 어버이는 아이한테 물려줄 만한 슬기가 없습니다. 삶을 모르니 삶을 물려주지 못해요. 돈이 있고 집이 있으며 자가용이 있어, 이런저런 물건이나 물질이나 문명은 물려준다지만, 막상 ‘물건이나 물질이나 문명을 건사하는 넋과 매무새’는 하나도 안 갖추었으니 못 물려줘요. 어마어마한 돈이든 빈털털이 가난이든, 어버이가 아이한테 무엇인가 물려주면서 ‘사랑과 꿈’을 나란히 물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돈을 물려받는 아이는 이 아이대로 망가집니다. 빈털털이 가난을 물려받는 아이는 이 아이대로 흔들립니다. 있는 돈이든 없는 돈이든 어떻게 건사하며 삶을 누리거나 즐길 때에 아름다운가를 모르니, 망가지거나 흔들려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시험성적 잘 나온들 무엇에 쓸까요. ㅅ대 ㄱ대 ㅇ대 같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는들, 이 아이들이 저희 삶을 아름답게 여밀 수 있을까요.


  요즈음 아이들은 손수 도시락 쌀 줄 모릅니다. 손수 차린 밥으로 어버이와 손님한테 내주지 못합니다. 자, 열다섯이나 스물쯤 된 사람으로서, 손수 밥을 차리지 못하고 도시락을 싸지 못한다면, 이 나이란 얼마나 덧없이 흐른 나날이 될까요. 제 옷가지를 제 손으로 빨래할 수는 있을까요. 전기가 끊어지면 빨래기계를 못 쓸 텐데, 손빨래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는 전기가 끊어지면 수도물도 끊어질 텐데, 이때에는 어떻게 밥·옷·집을 건사할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무엇을 안다고 할 만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학교에‘도’ 갈 수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들은 무엇보다 ‘삶을 배울’ 아이입니다. 삶을 배우면서 ‘사랑을 누리’고 ‘꿈을 나눌’ 아이입니다.


  삶·사랑·꿈이 없으면 하루가 얼마나 따분하고 뜻이 없을까 생각할 노릇입니다. 오늘날 어버이와 어른 누구나 삶·사랑·꿈을 건사하지 않기에, 오늘날 아이는 삶·사랑·꿈을 물려받지 못하기도 하고, 구경하지 못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듣지도 못해요.


  어른들한테 묻습니다. 어버이들한테 여쭙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며 삽니까. 당신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물려줍니까. 4345.11.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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