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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희재 지음 / 청년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사랑받고 싶어서 태어나는 사람
[시골사람 책읽기 005] 이희재,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청년사,2003)
만화책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청년사,2003)는 바스콘셀레스 님 글에 이희재 님이 그림을 붙였습니다. 만화책 끝자락에 “전 아이들에게 가끔 딱지와 구슬을 나누어 주곤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별로 위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 어린 시절의 저를 만났습니다(370쪽).”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소설책으로든 만화책으로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는 책이 우리한테 들려주려는 이야기란 바로 이 대목이라고 느낍니다. 누구나 삶에 사랑이 있어야 빛납니다. 누구라도 삶에 사랑이 없으면 빛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찾아 이 지구별에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누리려고 이 지구별에서 이야기꽃 피우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려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을 쓰려고 삶을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름을 얻으려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름을 떨치려고 삶을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받아 태어나는 사람이요, 오직 사랑을 즐기면서 하루를 빛내는 사람입니다.
갓난쟁이한테뿐 아니라 어린이한테도 돈은 덧없습니다. 어린이한테뿐 아니라 푸름이한테도 돈은 부질없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돈이 있으면 과자를 산다든지 피자를 산다든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든지 여길는지 모르나, 이런저런 주전부리나 피시방 게임이란 사랑하고 동떨어집니다. 콜라 한 병을 사다 마신대서 사랑이 싹트지 않아요. 초콜릿 하나를 사다 먹는대서 사랑이 피어나지 않아요. 한동안 배가 부르다 하지만, 사랑으로 빚은 밥 한 그릇이 아닐 때에는 마음이 넉넉해지거나 따스해지지 않아요. 따순 손길로 어루만지는 어버이가 반가운 아이들이에요. 고운 눈길로 바라보는 어른이 좋은 아이들이에요.
.. ‘히히히, 아무도 너(라임오렌지나무)와 내가 친구가 된 것을 몰라. 식구들이 우리가 얘기를 하게 된 걸 알면 까무라칠 거야.’ .. (98쪽)
우는 아이한테는 젖을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냥 젖이 아닌 사랑이 담긴 젖을 주어야 합니다. 아픈 아이한테는 몸을 다스리는 약을 주든 누워서 쉴 자리를 주든 해야 할 텐데, 약이든 무엇이든 처방전 아닌 사랑이 깃든 것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이 감돌지 않으면 밥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서리지 않으면 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어리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없는 채 이루어지는 교육은 교육 아닌 훈육이나 지도편달이 될 뿐입니다. 훈육이나 지도편달로는 지식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꿈이나 슬기를 빛내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공부 여섯 해를 보내면서 대학교에 붙는들 무슨 보람이 있을까 생각해야 해요. 대학교에 붙으려고 보내야 하는 여섯 해 푸른 삶이어야 할까요. 참으로 푸르게 누리면서 빛낼 여섯 해 삶이 아닐까요. 어른들은 돈을 많이 벌면 즐거운 삶일까요? 돈을 벌려고 태어나서 돈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어른일까요?
아침에 씩씩하게 일어난 우리 집 다섯 살 아이가 어머니랑 뒷밭으로 가더니 까마중을 따서 먹습니다. 고흥 시골마을에서는 12월이 코앞이라 하지만 빈 들과 빈 밭 한켠에 까마중이 자랍니다. 곱게 둔 밭자락 한켠에는 가을쑥이 아직 푸른 빛 마음껏 뽐내며 자라다가는 잎 끄트머리가 붉게 물들며 쑥꽃을 피웁니다.
마을 어디를 가도 쑥을 잡풀로만 여겨 베어 없애거나 약 뿌려 죽이려고만 합니다. 쑥내음 맡으며 예쁘게 바라보다가 쑥꽃 곱다라니 줄지어 달린 모습을 지켜보기란 참 힘들어요. 그러고 보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 하더라도 풀꽃 한 송이 살뜰히 구경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망초를 보면 밭 다 망가뜨린다고 얼른 잡아서 뽑으려고만 하지, 달걀처럼 하얗고 노란 봉우리를 느끼려 하지 않아요. 아이도 어른도 너무 바쁩니다. 아이도 어른도 느긋한 마음이 못 됩니다. 아이도 어른도 너무 한 가지만 바라봅니다. 아이도 어른도 삶을 누리는 기쁨을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 “이대로는 학교에 갈 수가 없으니 집으로 데려다주마. 며칠 쉬면 금방 아물 거야. 정말 잘 참았구나. 나는 네가 그렇게 용기가 있는 아이인 줄은 몰랐다. 난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말이다. 정말로 커서 내게 앙갚음을 할 생각이니?” .. (207쪽)
시골마을마다 따로 돈을 들이고 품을 들여 빈 논자락에 유채씨를 뿌려야 예쁜 꽃을 구경할 수 있지 않습니다. 아무 돈을 안 들이고 아무 품을 안 들여도, 빈 들을 가만히 두면, 온갖 들꽃이 저마다 다른 빛과 무늬를 뽐내며 얼크러집니다. 들에 잡풀 많이 자라 걱정스럽다고요?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아요. 어차피 요즈음은 경운기나 트랙터를 써서 논갈이를 하잖아요. 외려 온갖 풀 잔뜩 자라면 온갖 풀이 저마다 다른 거름 노릇을 해요. 괭이밥풀은 괭이밥풀대로 거름이 됩니다. 씀바귀는 씀바귀대로 거름이 됩니다. 냉이는 냉이대로, 보리뺑이는 보리뺑이대로, 지칭개는 지칭개대로, 미나리는 미나리대로, 고들빼기는 고들빼기대로 저마다 거름이 되어요. 논갈이를 해서 거름으로 바뀌기 앞서는 맛난 풀이 됩니다. 맛있는 봄나물 봄풀이에요.
유채는 잎이란 줄기를 맛나게 먹을 수 있기는 한데, 유채만 먹고는 어떻게 살아요. 유채도 먹고 비름나물도 먹어야지요. 갓도 먹고 돗나물도 먹어야지요. 쌀밥만 먹고는 못 살잖아요. 국도 먹고 김치도 먹으며 무랑 배추랑 시금치랑 골고루 먹어야지요. 보리밥도 먹고 수수밥도 먹어야지요.
도시 한복판에 애써 나무를 심거나 꽃을 심어야 예쁜 길이 되지 않습니다. 관청에서 돈을 들여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능금씨 하나 심고, 배씨 하나 심으며, 감씨 하나 심으면 돼요. 빈터를 마련하고, 도시에서도 동네마다 곳곳에 마을밭이 있으면 됩니다.
능금씨 한 알은 천천히 자라 처음에는 새끼손가락만 하게 자라고, 이윽고 어른 팔뚝만큼 자라다가는, 열 해쯤 지나면 어른보다 키가 클 테고, 스무 해쯤 되면, 또는 열다섯 해쯤 되면 열매를 내어줄 수 있겠지요.
하루아침에 뚝딱 우지끈 짓는 건물이 아름다우리라 생각할 수 없어요. 오백 해를 살아온 나무로 집을 지으면 오백 해를 가고, 이천 해를 살아온 나무로 집을 지으면 이천 해를 간다고 해요. 우리 스스로 어떤 삶을 일구고 싶은가를 헤아리며 집을 지을 노릇이요, 나 스스로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은가를 헤아리며 살림을 꾸릴 노릇입니다.
.. “푸른 이파리가 낙엽이 되어 떨어져도 사라지지 않고 다음해에 싹으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무엇이든 사라지는 것은 없단다. 하잘것없는 풀이 겨울엔 건초가 되어 치즈를 만드는 데 쓰이지 않니? 제제, 기운을 내렴. 누구라도 서로 잊지 않고 가슴속에 깊이 품고 있으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단다.” .. (322쪽)
사랑받고 싶어서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사랑받고 싶어서 자라는 풀입니다. 사랑받고 싶어서 아침마다 해가 새롭게 뜹니다. 사랑받고 싶어 들새와 멧새는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받고 싶은 가을바람이 때로는 서늘하게 때로는 따사롭게 붑니다.
고흥 어른들은 고흥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싶은가 궁금합니다. 고흥 아이들은 어떤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는가 궁금합니다. 고흥이라는 마을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사랑이 넘치는 곳인지 궁금합니다. (4345.11.22.나무.ㅎㄲㅅㄱ)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바스콘셀레스 글,이희재 그림,청년사 펴냄,2003.3.25./15000원)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