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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수도원 ㅣ 민음의 시 100
고진하 지음 / 민음사 / 2001년 4월
평점 :
모든 책이 나한테 온다
[시를 노래하는 시 22] 고진하, 《얼음수도원》
- 책이름 : 얼음수도원
- 글 : 고진하
- 펴낸곳 : 민음사 (2001.4.9.)
- 책값 : 5500원
서울에서는 먹을거리가 지나치게 많아서, 서울에서 살아가다 보면 다들 무언가를 크게 잃어버려요. 그런데 서울에만 먹을거리가 지나치게 많지는 않아요. 부산도 인천도 광주도 먹을거리가 지나치게 많아요. 돈 얼마 치르면 어디에서나 숱한 먹을거리가 내 앞에 놓여요.
서울사람은 손에 흙 한 줌 안 묻히고도 밥을 먹어요. 부산사람은 손에 핏방울 하나 안 묻히고도 고기를 먹어요. 인천사람은 손에 바닷물 한 방울 안 묻히고도 물고기를 먹어요. 광주사람은 손에 가시 한 번 안 박히고도 포도랑 능금이랑 대추랑 밤이랑 맘대로 먹어요.
모두들 손에 아무것 안 묻히면서 배만 불러요. 모두들 손에 무엇을 들고 살아가는가를 돌아보지 않고 잔뜩 먹어요. 이러면서 밥쓰레기가 잔뜩 나와요. 여느 밥집에서도, 여느 살림집에서도, 여느 학교나 기관 급식실에서도, 온통 밥쓰레기예요.
밥쓰레기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니까, 따로 밥쓰레기를 건사하는 공장이 서야 해요. 밥쓰레기가 해마다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하는 한국인데, 정작 한국 ‘식량자급율’은 20%를 웃돌까 말까 해요. 게다가 20%라는 숫자도 쌀 하나 때문이지, 다른 모든 먹을거리를 헤아리면 한국이라는 나라 식량자급율은 1%도 안 된다고 할 만해요.
..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 산책은, /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 (꽃뱀 화석)
무언가 느끼는가요. 무언가 일그러진 삶을 느끼는가요. 스스로 엉터리로 살아가는 줄 무언가 느끼는가요. 재벌 우두머리나 관료 몇 사람이나 정치꾼 아무개가 엉터리라는 소리가 아닌, 바로 여느 사람이라 하는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일반 시민’이야말로 엉터리로 살아가기에 이 나라가 엉터리로 굴러가는 줄 조금이나마 느끼는가요.
대통령 한 사람이 내놓는 밥쓰레기는 아주 작아요. 정치꾼 삼백 사람이 내놓는 밥쓰레기는 조금 많겠지요. 공무원 수십만이 내놓는 밥쓰레기는 훨씬 많겠지요. 그런데, 모든 밥쓰레기 가운데 가장 많은 부피는 바로 서울에서 나와요. 다음으로 부산이요, 다음으로 대구일 테고, 고양이나 성남이나 용인에서도 엄청나게 쏟아지겠지요.
시골에는 밥쓰레기가 없어요. 짐승이 함께 먹는 밥이에요. 밥쓰레기가 있는 시골은 없어요. 먹고 남으면 흙으로 돌려보내요. 거름이 되니까 흙이 먹는 밥이 돼요.
밥을 먹은 사람이 누는 똥오줌도 서울에서는 몽땅 쓰레기예요. 이른바 ‘똥쓰레기’쯤 될까요. 서울 한 곳에서 나오는 똥쓰레기는 얼마나 많을까요. 부산이랑 대구랑 인천이랑 대전이랑 울산에서 나오는 똥쓰레기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시골에는 똥쓰레기가 없어요. 요사이는 몇 군데를 빼놓고 화학농사를 짓기에 똥거름을 잘 안 쓴다지만, 시골에서는 똥오줌만큼 훌륭한 거름이 없어요.
.. 바짝 말라붙은 섬진강, / 움푹움푹 패인 몇 개의 웅덩이에 / 고인 물이 썩고 있다. / 바위도 자갈들도 썩는지 거무튀튀하다. / 이름뿐인 강, 그렇지만 / 이름 그대로 나그네인 나는 / 정처 없는 이 발길을 멈추지 못한다 .. (토지문학공원 5)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서울로 가면서 시골살이가 무너져요. 그런데,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이는 서울은 사람살이가 일어서나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하는 말은 누가 지었을까요. 이런 말은 어떤 꿍꿍이로 지었을까요.
사람들 잔뜩 모인 서울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살이를 이루는가 궁금해요. 사람이 지나치게 모인 나머지, 서로 금을 긋지 않나 궁금해요. 참말 그렇잖아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입으로는 외치지만, 정작 서울사람 스스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금을 그어요. 그런데, 정규직·비정규직 금을 긋기 앞서 장애인·비장애인 금을 그었어요. 장애인·비장애인 금을 긋기 앞서는 대졸자·고졸자·무학자 금을 그었어요. 요사이는 얼굴이랑 몸매로도 금을 그어요. 또, 은행계좌 크기로도 금을 그어요. 자가용 크기로도 금을 긋잖아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서울이라 하는데, 정작 사람을 끌여들여서 하는 짓이란,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삶에 허덕이도록 내모는 짓으로만 보여요. 왜 서로 다투어야 하나요. 왜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하나요. 왜 등수와 시험이 있어야 하나요. 왜 서로 겨루고 서로 해코지하고 서로 미워해야 하나요.
진보도 보수도 부질없어요. 아름다이 살아갈 꿈을 키워야 할 뿐이에요. 거지한테 동냥을 하면서 “이봐, 자네 진보인가? 보수인가?” 하고 물어 보나요. 배고픈 이한테 밥 한 그릇 나누어 줄 적에 “이보게, 자네 대통령 누구를 뽑을 텐가?” 하고 물어 보나요. 예배당에서 떨꺼둥이한테 밥 한 그릇 나누어 주는 자리에서조차 ‘진보와 보수’ 금은 안 그어요. 다만, 몇몇 예배당에서는 예배를 보아야 밥을 준다 하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누구한테나 밥을 주는걸요. 떨꺼둥이 아닌 사람한테도 밥을 주는걸요. 당신이 진보라면 보수한테는 밥 한 톨 안 줄 생각인가요? 당신이 보수라면 진보한테는 10원 한 닢 안 줄 생각인가요?
.. 수도원보다 오래된 늙은 측백나무, / 한쪽 허파를 떼낸 사람처럼 서 있다 .. (낙타무릎의 사랑 1, 피정 일기)
어버이는 누구나 열 손가락이 다 아파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을 턱이 없어요. 팔을 잘라 봐요. 안 아픈가요. 다리를 잘라 봐요. 걸을 수 있나요. 백 마리 양이 있을 때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었으면,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야 해요. 아흔아홉 마리를 건사한다고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내동댕이치면, 앞으로는 아흔아홉 마리에서 또 한 마리가 길을 잃을 테고, 아흔여덟 마리에서 다시 또 한 마리가 길을 잃을 테니까요. 모든 양을 골고루 사랑하고 아끼는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가야 해요. 아름답게 살려고 해야 아름다웁거든요.
벚꽃이 아름다우면 매화꽃도 아름답겠지요. 장미꽃이 예쁘면 감꽃도 예쁘겠지요. 철쭉꽃이 어여쁘면 부추꽃도 어여쁘겠지요. 모든 꽃은 저마다 곱게 빛나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맑게 빛나요.
그런데, 서울이든 부산이든, 이 땅에서 도시라 하는 곳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맑게 빛나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안 빛날 만한 사람이란 없어요. 안 고운 꽃이 없고, 안 맑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서울은 너무 커진 나머지, 서울 스스로 아름다운 사랑을 버렸어요. 부산은 지나치게 커진 탓에, 부산 스스로 아름다운 꿈을 버렸어요.
돈을 번대서 살아갈 수 있지 않아요. 사랑을 나누어야 살아갈 수 있어요. 큰 아파트를 한 채 장만한대서 느긋하게 지낼 수 있지 않아요. 꿈을 꾸어야 너그러이 지낼 수 있어요.
사랑을 먹으며 자라는 아이들이듯, 사랑을 나누며 활짝 웃는 어른들이에요. 사랑을 꽃피우며 크는 아이들이듯, 사랑을 품앗이처럼 나누며 어깨동무하는 어른들이에요.
.. 집에 돌아와 신발 끈을 풀어도 내 / 산책은 끝나지 않습니다 / 하루가 천년 같은 나의 하루는 / 이렇게 깊습니다 .. (이렇게 깊습니다)
모든 책이 나한테 옵니다. 종이책이 나한테 오고, 삶책이 나한테 오며, 사랑책이 나한테 옵니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아이들 조그마한 손길을 타고 콩닥콩닥 뛰는 숨소리가 나한테 옵니다. 이 어여쁜 ‘어린이책’이라고는! 들길을 거닐다 유채풀 한 포기 살며시 뜯어 입에 넣고 냠냠 씹습니다. 유채잎을 타고 봄기운 여름기운 가을기운 살그마니 스며듭니다. 이 어여쁜 ‘풀책’이라고는!
파란 하늘 올려다보면서 하늘책을 누립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별책을 누립니다. 살가운 동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야기책을 누립니다. 밥을 지으며 밥책을 누리고, 빨래를 하며 빨래책을 누려요. 온통 책입니다. 온통 사랑이요, 온통 꿈입니다.
.. 뚝, 뚝, 꺾어다 찐 옥수수마다 통통한 벌레들이 / 둥지를 틀고 살았던 흔적이 / 꺼뭇꺼뭇하다 / 나는 마음놓고 옥수수를 뜯어먹는다 .. (나는 마음놓고 하모니카를 분다)
시집 하나 펼칩니다. 고진하 님이 쓴 《얼음수도원》(민음사,2001)입니다. 왜 얼음수도원일까 궁금하지만, 고진하 님 스스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살아가는 꿈이 ‘얼음수도원’이니까 이러한 이름을 붙여 이러한 싯말을 길어올리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얼음을 빗대어 사랑을 말할는지 모르고, 수도원을 빗대어 책을 말할는지 몰라요. 어머니 삶을 돌아보며 수도원을 헤아릴 수 있고, 잎사귀 하나 바라보며 얼음을 떠올릴 수 있어요.
.. 뜸뜨는 밥솥 곁에서 평생을 사신 어머니, / 밥 냄새는 구수하다 .. (85쪽)
스스로 찾는 삶이고, 스스로 찾는 넋이며, 스스로 찾는 책입니다. 스스로 찾는 사랑이고, 스스로 찾는 말이며, 스스로 찾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읽는 책은 ‘내가 읽는 책’입니다. 나는 ‘추천도서’를 읽지 않습니다. 나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읽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할 책’을 읽습니다.
내가 사랑할 책이란 ‘백만 사람이 읽었다는 책’일 수 있고, ‘백 사람조차 안 읽고 사라진 책’일 수 있습니다. 어느 책이든 나는 나 스스로 사랑할 만한 책을 찾아서 즐겁게 읽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할 책을 읽으면서 내 가슴속에서 사랑 한 줄기 샘솟도록 이끕니다.
내 삶은 내가 누립니다. 남이 내 삶을 누리지 않습니다. 내 아이들 삶 또한 내 아이들이 누리지 내가 누리지 않습니다. 내 삶은 내가 누리지 내 어버이가 누려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바라보고 싶기에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바라봅니다. 스스로 마주하고 싶기에 아이들 상긋 웃는 얼굴을 마주합니다. 스스로 즐기고 싶기에 늦가을에도 찬바람 맞으면서 들길을 아이들이랑 자전거로 달립니다.
.. 비에 젖어도 푸른 잎새엔, / 비의 지문이 남지 않을 것이다 .. (뻐꾸기의 지문)
서울에 깃든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밥쓰레기로 만들지 않으면서 돈 아닌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때에는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산에 보금자리 마련한 사람들이 손수 흙을 만지며 푸성귀 몇 가지를 거둘 수 있을 때에 사람살이가 얼마나 예쁘게 거듭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총칼을 든 혁명으로도 나라를 바꾸겠다면 바꾸겠지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뽑는 일로도 나라를 고치겠다면 고치겠지요.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이 나라를 바꾸고 이 마을을 고치고 싶어, 내 삶부터 내 손으로 가다듬습니다. 멧새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시를 읽습니다. 가을바람 살랑이는 보드라운 결을 느끼면서 밥을 짓습니다. 아이들 씻기고 나서 아이들 옷가지를 복복 빨아 풀벌레 노랫마디 읊으며 빨래를 넙니다.
.. 펼쳐 읽지 않고 품에 안고만 있어도 좋은 책이 있다 한다. // 그런 품을 지닌 이가 / 지금은 바다를 안고 있다 .. (그런 품)
모든 책이 나한테 옵니다. 모든 그리움이 나한테 옵니다. 모든 사랑이 나한테 옵니다. 모든 이야기가, 모든 꿈이, 모든 믿음이, 모든 노랫가락이, 모든 손길이 나한테 천천히 다가옵니다.
하늘은 파랗고 들판은 누렇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들면 하늘은 새삼스레 파랗게 빛날 테며 들판은 푸르게 달라지겠지요.
숲에서 나무가 자라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헤엄칩니다. 하늘을 나는 제비가 저 먼 바다를 가로질러 우리 집 처마로 찾아들 테고, 옛 보금자리를 손질해서 새로운 새끼를 낳겠지요. 새로운 새끼는 무럭무럭 자라는 우리 아이들 머리 위에서 노래를 부를 테고, 햇살은 따사롭게 온누리를 감싸겠지요.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