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빛, 책은 밝은 데에서 읽자

 


  내 눈은 나쁘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내 눈은 1.5였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부터 학교에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시키는데다가 운동장에서 뛰놀 겨를이 몽땅 사라지고 보니, 차츰 내 눈이 나빠진다. 빽빽한 감옥과 같은 교실에서 형광등 불빛만 받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시달리기를 여섯 해 하면서 내 눈은 아주 나빠진다.


  어떤 아이는 이런 곳에서 지내더라도 안경을 안 쓰고 눈알이 똘망똘망 살아남기도 한다. 용한 노릇일까. 집에서나마 눈을 쉬었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새벽버스나 밤버스를 타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에도 책을 읽었다.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려고 바둥거리며 살았다. 어두운 새벽녘 버스 등불이나 길가에 켜진 등불에 기대어 책을 읽었기에 눈이 나빠졌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눈뿐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 차가운 시멘트교실에서 지나치게 짓눌렸기에 몸뚱이와 마음 모두 깊이 아프면서 고달팠구나 싶다.

  사내라면 모두 끌려가는 군대에서는 강원도 양구 비무장지대에 있었으니 눈길이 확 트이는 멋스러운 터전이라서 눈이 맑아진다고 여길 만한데, 군대 내무반은 학교 교실이나 감옥이랑 똑같다. 어느 모로 보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더 어둡고 더 무서우며 더 끔찍하달 만하다. 늘 죽음이 감도는 군대에서 나 스스로 삶을 얼마나 생각했을까. 아니, 모든 것이 온통 죽음인 곳에서 ‘그래,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생각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다섯 살 큰아이가 그림책을 펼칠 때면 으레 가만히 바라본다. 넌지시 한 마디 한다. “벼리야, 책을 보려면 밝은 데에서 보자. 몸을 밝은 곳으로 돌려서 책을 보자. 엎드려서 읽어도 좋고 누워서 읽어도 좋아. 다만 밝은 데에서 보면 돼.”


  밝은 빛은 밝은 빛이다. 밝은 빛에 수많은 이야기가 감돌며 찾아든다. 가을날 밝은 빛살을 느낀다. 새롭게 열린 아침에 환하게 흐드러지는 빛줄기를 느낀다. 햇빛은 내 가슴속 빛을 깨운다. 햇빛은 아이들 가슴속 빛을 함께 깨운다. 햇빛은 종이책에 서린 나무 기운을 살그마니 건드리면서 책빛으로 다시 태어난다.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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