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생활 (시골과 도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찻집에 들르거나 옷집에서 구경하는 일이 ‘문화생활’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러저러한 ‘돈 쓰는 일’이 문화생활이라고 합니다. 참 마땅한 노릇이리라 느낍니다. 돈을 쓰기에 ‘문화생활’입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누리려고 애씁니다.


  흙을 만지거나 숲바람을 느끼거나 냇물을 마시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한테서 열매를 얻는 일은 ‘삶’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러저러한 ‘하루를 일구는 이야기’는 먼먼 옛날부터 누구한테나 삶이었습니다. 더없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하루를 일구며 온갖 이야기를 길어올리기에 삶입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을 누립니다.


  시골 살던 사람이 도시로 나아가는 까닭은 삶보다 문화생활을 가까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푸름이로 지내며 중·고등학생 때에 도시를 그리다가, 고등학교를 마치거나 대학교로 가면서 도시로 가는 까닭은 삶과 견주어 문화생활이 재미있거나 즐거우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삶을 누리지 못했거나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도시 아이들과 똑같이 시험공부만 했기 때문이에요. 틈틈이 삶을 누리며 하루를 빚지 못하면서, 꾸준히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도시로 나들이를 다녔기 때문이에요.


  거꾸로, 도시 살던 사람이 시골로 나아가는 까닭은 문화생활보다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문화생활이 이녁 넋이나 얼을 살찌우거나 북돋운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바로 삶을 누려야 이녁 넋이나 얼을 살찌우거나 북돋우는구나 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험공부만 하는 중·고등학교 나날이 고단합니다. 삶을 등진 채 시멘트 건물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교과서와 문제집만 파고들어야 하잖아요. 풀 한 포기 자라는 아주 작은 틈에서 빛을 느끼고, 꽃 한 송이 피어나는 풀섶에서 빛을 깨달으며, 나무 한 그루 서는 흙땅에서 빛을 찾아요. 돈을 벌어 돈을 쓰는 굴레 아니라, 삶을 일구며 삶을 짓는 꿈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서요.


  그런데,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와서 살아가고 보니, 책도 영화도 한껏 느긋하게 즐깁니다. 외려 도시에서 살 적에는 책도 영화도 그닥 느긋하게 못 즐겼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는 집삯을 벌고 무슨무슨 돈을 버느라 한결 빡빡하고 바쁘며 얽매여요. 보드라운 바람소리나 상긋한 풀벌레 노래나 해맑은 들새 노래를 듣지 못하는 도시예요. 자동차 오가는 소리로 시끄러운 데에서는 책도 영화도 살살 녹아들기 힘들어요. 시골에서 흙을 더 자주 더 오래 만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늘 흙 곁에서 흙내음을 맡아요. 흙내음 풍기는 햇볕을 실컷 느끼며 책을 읽고, 종이책을 안 읽어도 나무와 풀과 꽃과 멧자락과 들과 냇물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숨결 같은 책’을 읽어요.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다르다지만, 창호종이문 바깥으로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컴퓨터로 영화를 볼 수 있어요. 밤하늘 별무리를 등에 지고 영화 보는 맛은 극장에서 뻑뻑한 숨을 참으며 영화 보는 맛하고 새삼스레 달라요.


  놀이공원이란 무엇일까요. 기계에 몸을 맡기어 움직여야 놀이가 될까 궁금해요. 내 몸을 내가 써서 움직이고, 내 팔다리를 나 스스로 움직이는 하루하루가 일이면서 삶이고 놀이가 되리라 느껴요. 바다가 놀이터예요. 골짜기가 놀이터예요. 들판과 논둑과 밭둑이 놀이터예요. 마당이 놀이터예요. 마루와 부엌이 놀이터예요. 어느 곳이나 놀이터이면서 일터예요. 그리고, 삶터예요. (4345.10.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