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다니는 아버지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를 둘이나 셋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를 만나기는 아주 힘들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들 둘이나 셋 데리고’ 다닐 뿐 아니라 너덧씩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를 만나기는 아주 쉽다. 맞벌이를 하는 집이 많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버이를 살피면 언제나 어머니일 뿐, 아버지가 아이들을 도맡에 데리고 다니면서 마실을 하는 일이란 거의 없구나 싶다. 아이들이 제법 커서 스스로 똥오줌을 누고 가게에서 먹을거리를 살 만한 나이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어버이 손길이 닿아야 하는 갓난쟁이나 많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는 참으로 보기 어렵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아버지보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느낀다. 어머니들은 ‘아기를 아끼고 아이를 사랑하는’ 유전자가 아버지들보다 훨씬 크거나 세거나 높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한테 아기와 아이를 아끼는 유전자가 있다면, 어머니 스스로 이러한 유전자를 북돋았겠지. 아버지한테 아기와 아이를 아끼는 유전자가 없거나 적다면, 아버지 스스로 이러한 유전자를 안 북돋았겠지.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반긴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다그침이나 꾸중을 안 반긴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까르르 웃으면서 뛰노는 삶을 반긴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옴쑥달싹 못하게 꽁꽁 얽매어서 시험공부만 시키는 삶을 안 반긴다.


  그런데, 어른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른이라 해서 꽁꽁 갇힌 삶을 반길까. 어른이라 해서 컨베이어벨트 부속품 같은 일을 반길까. 어른이라 해서 톱니바퀴처럼 쳇바퀴 도는 삶을 반길까. 어른들은 아이들을 먹여살리거나 집안을 꾸린다고 말하는데, 참말 삶을 일구면서 살림을 돌보자면, 어버이(어른)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터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일거리를 찾아 가장 사랑스러운 땀을 흘리면서 활짝 웃을 만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느낀다.


  아이들과 다닌다. 아이들은 웃고 춤춘다. 아이들은 노래하고 뛰논다. 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앞서, 나는 그저 내 두 다리로 온누리를 누비며 살아가는 나날을 좋아했다. 나한테 있는 돈은 온통 책을 사느라 다 썼기에 자가용 굴릴 돈은 남아나지 않기도 했으나, 두 다리를 움직여 이 골목 저 고샅 그 들판을 걸어다닐 때에 살아가는 기쁨을 누렸다. 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로서는 아이들 먹여살리는 데에 살림돈을 다 쓴다. 요사이는 책을 사서 읽는 돈은 거의 안 쓴다. 그렇다고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다. 종이책은 덜 읽지만 ‘아이책’, 곧 ‘아이 눈빛과 몸짓과 마음결로 읽는 책’은 날마다 실컷 읽는다. 이리하여, 아이들과 살아가는 아버지인 나는 자가용은 못 굴리고, 두 팔로 아이들을 안고 걷는다. 큰아이는 커서 홀로 씩씩하게 저 앞으로 멀리 내닫다가 다시 나한테 달려온다. 작은아이는 작아서 혼자 걷고 뛰다 지치면 울먹울먹거리며 안아 달라 한다. 작은아이를 안는다. 작은아이를 걷고 큰아이 손을 잡는다. 내 등줄기와 허벅지와 이마와 어깨를 타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그런데 내 낯은 찡그리지 않는다. 그저 좋다. 이렇게 아이들 살내음을 느끼고 내 땀내음을 풍긴다. 아이들은 두 다리로 이 땅을 튼튼히 디디고, 두 팔로 이 하늘을 마음껏 껴안는다.


  내가 아버지 아닌 어머니였으면 어떠했을까. 어쩌면,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 아닌 어머니로 태어나 살아갔다면 내 옆지기일 사내는 여느 사내들처럼 집일이나 집살림하고 등을 졌을까. 나는 어머니 아닌 아버지로 태어나서 오늘날 여느 어머니가 도맡는 집일이랑 집살림을 도맡을 수 있기에, ‘어머니 아닌 한 사람으로서 맡을 사랑과 꿈’이 무엇인가를 온몸 깊숙하게 느끼는 나날이 아닐까. (4345.10.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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