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652) 식물적 1 : 식물적으로 그립다

 

나도 오늘은 아주 식물적으로 독방이 그립다
《문태준-가재미》(문학과지성사,2006) 25쪽

 

  ‘독방(獨房)’이란 혼자서 쓰는 방을 가리킵니다. 흔히 쓰는 낱말이니 굳이 다듬을 까닭이 없다 할 만하지만, 한자를 엮어 ‘獨(혼자) + 房(방)’을 이루듯, 한국말을 곱게 엮어 새말을 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글흐름에 맞추어 “혼자 쓰는 방”이나 “혼자 있는 방”처럼 풀어서 적을 수 있어요. “혼자 지낼 곳”이나 “혼자 머물 자리”처럼 적어도 잘 어울려요.


  ‘식물적(植物的)’이라는 낱말을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식물적’이 안 실립니다. 이와 맞선다 할 ‘동물적(動物的)’이라는 낱말은 실립니다. ‘동물적’을 국어사전에 싣는다면 ‘식물적’도 국어사전에 실을 만할 텐데, 뜻밖에 ‘식물적’은 국어사전에 안 실려요.


  그런데, ‘식물’은 무엇이고 ‘동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이 두 가지 낱말을 왜 써야 했을까요. 우리한테 이러한 낱말이 없으면 우리가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을까요.

 

 식물적으로
→ 식물처럼
→ 식물과 같이
→ 식물이 되어
→ 식물답게
 …

 

  ‘식물’이든 ‘동물’이든 써야 할 자리에는 알맞게 쓸 일입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구태여 안 써도 될 만한 자리에는 안 쓰면 될 노릇입니다. 두 낱말 뒤에 붙이는 ‘-的’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꼭 붙이고 싶다면 붙일 일이지만, 굳이 안 붙여도 된다면 안 붙이면 될 노릇이에요.


  “식물적으로 그립다”는 말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어떻게 그립기에 “식물적으로” 그립다고 말할 만한가요.


  사람이 사람 아닌 “식물이 되어” 어떤 삶이 그립다 하기에 “식물적으로”라 적었을 테지요. 사람이면서 사람 아닌 “식물처럼” 생각하며 무언가를 그립다 하기에 “식물적으로”라 적었겠지요.

 

 풀처럼
 푸나무와 같이
 들풀이 되어
 풀꽃답게

 

  보기글은 싯말입니다만, 싯말 아닌 여느 말이라 삼으며 가만히 헤아립니다. 어느 시인이 쓴 글이 아닌 내가 누군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이라 여기며 곰곰이 짚습니다. 시인 아무개가 쓴 글을 다듬는다기보다, 내가 내 좋은 동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에 어떤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고 찬찬히 가다듬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글다듬기란 없습니다. 아무개 글을 이렇게 고치는 글다듬기란 없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내 생각을 나타내겠다는 글쓰기입니다.


  곰곰이 짚으면, 바른 말도 고운 말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바로쓰기요 저렇게 해야 살려쓰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을 빛낼 때에 바로쓰기이고, 스스로 사랑을 나눌 때에 살려쓰기입니다.


  찬찬히 가다듬으면, 문학이란 아무것 아닙니다. 시라서 더 돋보이는 문학이 아니요, 이름난 시인이라서 더 훌륭한 문학이 아니에요. 신문이나 잡지에 안 실려도 즐겁게 누릴 글입니다. 책으로 안 나오더라도 예쁘게 읽을 글입니다.


  나는 스스로 풀이 되어 생각합니다. 나는 조용히 나무가 되어 헤아립니다. 나는 바야흐로 꽃이 되어 되짚습니다.


  싱그러이 살아서 숨쉰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상큼하게 빛나며 어여쁘다는 글을 헤아립니다. 해맑게 춤추며 노래한다는 이야기를 되짚습니다.


  무언가 꾸미려 하면 꾸미기만 할 뿐, 속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아끼거나 누릴 한국말은 몇몇 학자나 전문가가 빚거나 만들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갈 때에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시골 할머니가 되든 골목동네 어린이가 되든,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새말을 빚습니다. (4345.8.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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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오늘은 아주 들풀처럼 혼자 지낼 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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