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짓는 손길과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58] Jorma Komulainen 엮음, 《Vision of Finland》(Kirjayhtyma,1990)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면서 나라밖 사진책을 기쁘게 장만하곤 합니다. 세계사진역사에 이름 한 줄 올리지 못한 이들이 빚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숱한 사진책을 재미나게 만나 예쁜 꿈을 꾸면서 사들이곤 합니다. 나한테 돈이 퍽 많았다면 헌책방 나들이를 안 즐겼을까 살짝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러니까, 돈있는 집에서 태어나 돈을 실컷 쓰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굳이 헌책방을 뒤지지 않으면서 지구별 숱한 사진책을 수만 수십만 권 장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있는 집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책길이나 사진길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길을 걸을는지 몰라요. 돈을 펑펑 쓰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안 사랑하는 길에서 헤맬는지 몰라요.


  꼭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사진책이 아닙니다. 반드시 돈이 넉넉해야 살 만한 사진기가 아닙니다. 돈이 적다면 적은 대로 사진책을 살 수 있습니다. 돈이 아예 없으면 얻어서 읽거나 빌려서 봅니다. 책방에 가서 선 채로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적으면 적은 돈에 맞추어 사진기를 장만할 수 있습니다. 돈이 아예 없으면, 남한테서 얻어서 쓸 수 있어요. 또는, 따로 기계를 써서 필름이나 메모리카드에 앉히지 않는 사진을 찍습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마음으로 아끼며 내 사랑으로 보듬을 사진을 누리면 됩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을 찾아가서 온갖 책을 신나게 들여다보다가 《Jorma Komulainen 엮음-Vision of Finland》(Kirjayhtyma,1990)라 하는 사진책 하나를 집어듭니다. 지구별 여러 나라에서 ‘제 나라를 이웃에 널리 알리려 하는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는 으레 ‘나라이름’만 적습니다. 때때로 ‘beautiful’ 같은 이름을 붙여요. “Vision of Finland”처럼 ‘앞날을 꿈꾸는 생각’을 이야기하려는 사진책은 퍽 드뭅니다.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여러모로 좋아합니다. 가 본 적 없고, 참말 가 본 적 없으니 겪은 적 없을 뿐더러, 내 곁에는 핀란드 동무나 이웃이 없어요. 그런데 이래저래 듣거나 마주하는 ‘핀란드 문화와 삶과 사회’는 매우 살가우면서 예뻐요. 요즈막에는 한국땅에 ‘핀란드 교육 혁명’ 이야기가 들어오기도 해요. 곧, 거꾸로 생각해 보면 돼요. 핀란드에 ‘한국 교육 혁명’ 같은 이야기가 흘러들 수 있을까요. 핀란드 아이들이 한국 학교 아이들처럼 ‘시험공부에 시달리’도록 핀란드 어른들이 함부로 내몰까요.


  핀란드 아이들이 좋은 배움터와 삶터와 놀이터와 꿈터를 누릴 수 있다면, 핀란드 어른들 또한 좋은 일터와 만남터와 숲터와 사랑터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라고 느껴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나란히 누리는 핀란드 숲일 테지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다 함께 즐기는 핀란드 책내음과 삶내음과 사랑내음일 테지요.


  사진책 《Vision of Finland》를 읽습니다. 핀란드에서 살아가는 여러 사진쟁이들 사진을 아기자기하게 담습니다. 따로 어느 한 사람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요, 사진이 한결같이 포근하고 저마다 맑게 빛납니다. 모두들 어떤 삶을 누리면서 사진을 찍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떠한 삶터에서 어떠한 이웃을 사귀며 지내기에 밝은 빛살을 살뜰히 품는 사진을 보여주는가 하고 가늠해 봅니다.

 


  한참 책장을 넘기다가, ‘무민’ 이야기를 쓰며 핀란드 어린이문학을 빛낸 ‘토베 얀슨’ 님 사진과 무민 모습이 두 쪽에 걸쳐 나오는 대목을 봅니다.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한국에서 한국을 널리 알리려는 사진책을 정부이든 공공기관이든 문화부이든 개인이든 상업출판사이든 이럭저럭 애써 내놓는다 할 때에, ‘한국 아이들 꿈을 보살피고자 어린이문학을 빛낸’ 분들 모습과 이야기를 한 자리 살포시 꾸밀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껏 이렇게 해 보리라 생각한 사진쟁이나 책쟁이나 글쟁이가 있었나 궁금합니다. 지구별 어느 나라나 ‘글’이나 ‘문학’을 빛낸 사람을 손꼽으며 예쁘게 기릴 적에는 으레 ‘어린이문학’으로 꿈과 사랑을 돌본 이들 이름부터 적바림하는 줄 깨닫는 한국 문화쟁이나 예술쟁이는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책 《Vision of Finland》에는 숲에서 살아가는 곰 사진도 몇 장 깃듭니다. 참말 숲에서 곰이 홀가분하게 살아가니까 이런 사진을 찍어서 실을 만하겠지요. 참으로 핀란드는 자연이 넓고 아름답기에 너르며 아름다운 숲과 들판과 바다를 해맑게 보여주는 사진을 찍어서 실을 만하겠지요.


  핀란드에도 헬싱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핀란드에서도 겨울올림픽이든 여름올림픽이든 퍽 커다란 행사나 경기를 치르곤 합니다. 그런데 핀란드에서는 ‘더 높이 세우는 건물’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 않습니다. 핀란드 사진책에서는 ‘더 크거나 더 우람하거나 더 대단하다’고 내세울 만한 모습은 굳이 보여줄 마음이 없는 듯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키가 더 커서 더 멋지지 않습니다. 얼굴이 더 예쁘장하다 말하기에 더 즐거울 삶은 아닙니다. 머리가 똑똑하대서 누구 한 사람이 가장 돋보이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큰 키도 작은 키도 없고, 가난하거나 가멸찬 살림도 없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누리는 좋은 나날이요, 저마다 손수 빚는 좋은 삶입니다. 올림픽에서 보리빛 메달을 목에 걸어야 눈밭을 싱싱 잘 달리지 않습니다. 시험을 치러 1등이 되어야 대학교에 붙지 않습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몇 분이나 몇 시간이나 몇 초라는 숫자에 맞추어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먹이는 밥그릇에 밥알 숫자를 하나하나 세어 담지 않습니다.


  좋게 누릴 삶을 생각하면서 좋게 나눌 사랑을 좋게 바라보는 눈길로 얼싸안는 손길일 때에 비로소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누군가는 눈물지으며 사진을 찍을 테고, 누군가는 웃음지으며 사진을 찍을 테지요. 괴롭거나 힘들다면 눈물바람 사진이 나올 만한데, 괴롭거나 힘든 나날에도 방긋 웃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가 보기에는 참 꾀죄죄하거나 고달프다는 삶이라 하지만, 언제나 스스럼없이 웃음지으며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있어요.

 


  무엇일까요. 무엇인가요.


  사진은 무엇이고, 사진으로 담는 삶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어 빚는 책은 어떤 넋을 담으면서 사랑스러운가요. 책에 담으려 찍는 사진은 어떤 얼로 빚을 때에 아름다운가요.


  여기에서 누리는 삶을 여기에서 찍습니다. 여기에서 짓는 삶을 여기에서 사진책으로 짓습니다. 사랑을 짓는 손길이 사진을 짓는 손길입니다. 꿈을 짓는 손길이 사진을 짓는 손길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손길이 사진을 나누는 손길입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밥 한 그릇 베푸는 손길이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좋은 사진을 누리도록 베푸는 손길입니다. (4345.6.17.해.ㅎㄲㅅㄱ)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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