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하는 어머니 곁에서

 


  달포 즈음 되었나 싶은데, 아이들 어머니가 깔개 하나 큼지막하게 뜨개질을 한다. 우리가 우리 깜냥껏 요모조모 꾸리는 서재도서관에서 ‘바닥에 털푸덕 앉아 책을 펼치고 읽기 좋을 만큼’ 널찍하게 깔개 하나 뜨개질을 한다. 마무리가 되려면 얼마쯤 걸릴까. 알 수 없다. 이달에 마칠 수 있을는지, 이듬달에 마칠는지 모른다. 실은 모자라지 않을는지, 더 마련해야 할는지 알 길이 없다.


  뜨개하는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며 생각하면 누구나 알는지 궁금한데, 이만 한 깔개를 손으로 뜨개해서 쓰는 품이나 값이나 돈을 따지자면, 참말 다른 사람이 뜬 물건을 돈을 치러 살 때에 ‘더 적은 돈’이 든다 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 깔개 하나를 뜨느라 들인 실값이나 바늘값이나 품값을 헤아리자면, 이 깔개 하나를 돈으로 어떻게 셈할 만한지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본다. 아시아 중서부에서는 가시내가 시집을 갈 때에 양탄자를 비롯해 수많은 뜨개옷과 뜨개꾸러미를 갖고 간다 한다. 가시내는 어릴 적부터 온갖 옷가지를 뜨개한단다. 어느 양탄자는 하나를 뜨느라 몇 해씩 품을 들인다고도 한다. 돈값으로 치면, 한국사람이 이런 양탄자 하나 사는 데에 들일 돈은 얼마 안 된다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양탄자이든 깔개이든 옷이든, 뜨개하는 사람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숨결이 깃들기 마련이다. 이런 뜨개꾸러미를 ‘숫자로 셈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쓴 글을 누가 ‘돈 얼마를 치러 사겠다’ 할 때에 값을 부르지 못한다. 내가 찍은 사진을 누군가 ‘돈 얼마를 치러 사겠다’ 할 때에도 값을 부르지 못한다. 나로서는 내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숨결을 담아 쓰는 글이요 찍는 사진인데, 이 같은 글과 사진에 어떤 숫자를 매길 수 있을까. 이 숫자는 마땅할까. 저 숫자는 알맞을까.


  우리 아이들이 부르는 예쁘장한 노래를 누군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아이들 웃음을 누군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온누리 어떠한 물건도 마음도 꿈도 사랑도 돈으로는 살 수 없으리라 느낀다. 돈으로는 오직 하나, 돈만 살 수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살아가며 아이가 된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랑 살아가며 어버이와 같은 목숨이 된다. 내가 쓰는 글은 온통 내 삶이요, 내가 즐기거나 누리는 사진은 언제나 내 삶이면서 내 목숨이다.


  비가 온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들썩인다. 풀잎이 팔랑거린다. 가느다란 빗줄기 사이로 나비가 춤을 춘다. 수국이 여름을 맞아 꽃잎을 활짝 벌린다. 들판에 갓 심은 모는 사름빛을 뽐내며 빗물을 맛나게 받아먹는다. 도시에서는 이 빗물이 갈 곳을 잃다가 하수구로 빠진다. 똑같은 빗물이라 하더라도 도시에서 내리기는 싫을 수 있겠지만, 도시에서 내리는 빗물은 아파트 꼭대기나 자동차 지붕이 아니라 골목동네 텃밭 한 자락 감나무 줄기에 떨어져 스르르 감나무 뿌리로 스며들다가는 바알간 감알 소담스레 익도록 거들고 싶으리라 느낀다. 오줌 아직 못 가리는 둘째가 어머니가 뜨개하는 커다란 깔개 귀퉁이에 살짝 쉬를 했다. 나는 모른 척하고 쉬를 치운다. 뜨개를 다 마무리지으면 신나게 빨아야지.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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