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과 ‘나들이’와 ‘마실’
[말사랑·글꽃·삶빛 8] 생각을 하며 쓰는 말
좋아하는 어린이책을 한 권 읽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글을 한국사람이 옮겼습니다. 군데군데 아쉽다 싶은 옮김말이 보입니다만, 속으로 아쉽네 하고 여긴 다음 지나칩니다. 이러다가 꼭 한 줄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밑줄을 그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사람들이 으레 이렇게 말을 하고 으레 이러한 말을 들으니까, 나 또한 이냥저냥 지나치면 그만일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사람들이 으레 쓰거나 듣거나 하더라도, 나부터 찬찬히 헤아리며 살짝 손질하거나 따사로이 보듬어도 좋을까 궁금합니다.
오소리 아저씨는 종이 옆에 ‘외출중’이라고 쓴 팻말을 걸어 놓고 세탁소 문을 나섰어요
《모이치 구미코/육은숙 옮김-숲 속 세탁소》(크레용하우스,2005) 16쪽
내가 어린이책을 쓴다면, ‘세탁소(洗濯所)’라는 낱말부터 안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책이니까요. 어린이들도 세탁소라는 가게쯤 안다 할 수 있으나, 아직 모르는 어린이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 살아가는 집에 ‘세탁기’ 없는 곳은 없다 할 만하지만, 그래도 어린이책에 넣을 글을 쓴다 할 때에는 ‘세탁기(洗濯機)’라는 낱말마저 안 쓰고 싶습니다.
어떤 낱말을 쓸까요. 어떤 낱말을 아이들한테 보여줄까요. 어떤 낱말로 아이들 생각밭에 말씨 하나 심을까요. 어떤 낱말로 아이들 넋과 꿈을 보듬는 길을 이끌면 즐거울까요.
일본사람 모이치 구미코 님 어린이책을 헤아립니다. 모이치 구미코 님은 ‘사람’ 아닌 ‘들짐승’을 빗대어 어린이문학을 펼칩니다. 사람 아닌 들짐승이 나오기도 하는 만큼, 들짐승 사이에서 쓰는 낱말이라고 여기며 조금 더 다르게 새 낱말을 빚어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탁소’ 아닌 ‘빨래집’이나 ‘빨래가게’라는 낱말을 쓰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빨래집’이나 ‘숲속 빨래집’ 같은 낱말을 넣고 싶습니다.
나는 빨래를 늘 손으로 했습니다. 나는 스무 해 동안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무 해만에 빨래하는 기계를 장만했지만, 빨래하는 기계가 집안에 들어왔어도 손빨래는 예전처럼 합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몫이 있거든요. 기계가 해 주더라도 사람이 손으로 주무르고 비벼야 하는 자리가 있어요.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빨래를 했’지, 따로 ‘손빨래를 하’지 않았어요. 얼마 앞서라 할 서른 해나 마흔 해쯤 앞서 이 나라에도 ‘빨래 맡는 기계’가 들어오면서 ‘기계빨래’와 다른 ‘손빨래’를 따로 나누어 가리킵니다. 곧, 빨래라 하면 예전부터 아주 마땅히 ‘손빨래’였는데, 이제는 빨래라 하면 아주 마땅히 ‘기계빨래’로 여겨요. 그러니 ‘손빨래’라는 낱말이 새로 생겨요. 되레 ‘기계빨래’라는 낱말이 생겨야 할 테지만, 막상 ‘기계빨래’라 말하거나 일컫는 사람은 아주 없거나 몹시 드물어요.
하찮다 싶은 대목일까요. 어쩌면 하찮다 싶은 대목인 ‘빨래’요 ‘洗濯’인지 몰라요. ‘밥’과 ‘食事’라는 말마디도 하찮다 여길 만한지 몰라요. 나는 늘 밥을 먹지만, 둘레 사람들은 으레 “식사 하셨어요?”처럼 물어요. “밥은 먹었나요?” 하고 묻는 사람을 보기 매우 힘듭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옷차림’이나 ‘입성’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아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패션(fashion)’이라고 말해요.
집에서 셈틀을 다루어 종이를 한 장 뽑는다 할 때에도 ‘종이를 뽑’거나 ‘종이에 글을 찍’는 일을 하지만, 막상 ‘종이뽑기’나 ‘종이찍기’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한자말로 ‘인쇄(印刷)’라 하거나 영어로 ‘프린트(print)’라 해요. 종이를 뽑거나 글을 찍는 기계를 가리켜 ‘프린터(printer)’나 ‘인쇄기(印刷機)’라고만 하지, 딱히 한국말로 어떻게 가리켜야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반드시 한국말로 이런 낱말이나 저런 낱말이 있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해야지 싶어요. 꼭 국어사전에 어떤 한국말이 옳게 실려야 하지는 않아요. 다만, 어린이문학을 하든 어른문학을 하든, 문학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이들은 한국말로 슬기롭게 생각하면서 한국말을 빛내는 길을 살펴야지 싶어요.
외출중 ↔ 나들이
회의중 ↔ 이야기
휴가중 ↔ 쉼
식사중 ↔ 밥
취침중 ↔ 잡니다
공부중 ↔ ?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 살림집에 아이 방을 따로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문에 조그마한 푯말을 걸곤 합니다. 이런저런 말마디가 적힌 푯말을 건다 할 텐데, 으레 ‘-中’이라 하는 말투만 붙어요. 여러모로 한국말을 더 깊이 살피는 말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요사이에는 아예 영어로 이렇게 가리키거나 저렇게 가리키기도 하겠지요. ‘공부중’이라 적기보다 ‘study’라 적는 사람이 더 많을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학교에서 교사나 아이들 스스로 ‘공부한다’라는 말보다 ‘스터디한다’라는 말을 제법 자주 써요. ‘공부 모임’처럼 말하는 이는 드물고, ‘스터디 모임’처럼 말하는 이가 훨씬 많아요.
말은 쓰는 사람 마음이니, 이렇게 쓰고 싶으면 이렇게 쓸 노릇이고, 저렇게 쓰고 싶다면 저렇게 쓸 노릇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생각합니다. 내가 내 나름대로 내 말빛을 북돋우고 내 말결을 살찌우면서 나눌 만한 말마디를 생각합니다. ‘공부중’이라 쓰기보다 “나 공부해요”라 쓰거나 “나 책 읽어요”라 쓸 수 있어요. “배웁니다”라 써도 즐겁습니다. 한 마디로 “책”이라 적을 수 있어요. ‘외출중’은 “밖”으로 적고, ‘회의중’은 “말”로 적을 수 있어요. 한 마디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두 마디나 세 마디로 맞추어 적어도 되고, 풀어서 적는 글로 갈무리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밖에 있어요”나 “바람 쐽니다”처럼 적습니다. “얘기 나눕니다”나 “이야기꽃”처럼 적습니다. (4345.5.17.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