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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색잉꼬 1
테츠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거룩한 보배와 풋내기 보풀
[만화책 즐겨읽기 146] 데즈카 오사무, 《칠색 잉꼬 (1)》
두 아이가 두 팔 쪽 뻗고 잡니다. 아침이 밝습니다. 아이들은 깊은 밤에 자꾸 깨어 보채거나 뒤챘습니다. 밤새 아이들 다독이느라 곁에서 나 또한 잠을 거의 못 이룹니다. 자고 싶으나 자지 못하니 힘듭니다. 보채고 뒤채는 아이한테 두 차례 물을 먹이고 무릎에 누이다가 가슴에 안다가 마당에 내려와 바깥바람 쐬며 별을 보다가, 다시 무릎에 누이다가 가슴에 안다가 셈틀을 켭니다. 이렇게 잠을 못 자니 셈틀을 켜서 일을 하자 생각하고, 둘째를 무릎에 앉힙니다. 이럭저럭 있자니 아이가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눈은 안 감습니다. 아이를 무릎에 다시 눕힙니다. 고개를 떨구고 팔을 쭉 뻗으며 잠듭니다. 자리 깔고 방석 놓은 다음 가만히 눕힙니다. 이불을 덮습니다. 이제는 깊이 잡니다.
- “이런 여우에게 농락당하는 듯한 얘길 자네는 믿는단 말인가?” (16쪽)
- “나는 아마추어요. 전문 배우가 아니야. 노라 페이튼은 대배우,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명배우지.” (105쪽)
아이 얼굴을 바라봅니다. 자던 아이가 갑자기 팔을 들어 활갯짓을 할라치면 곧장 팔을 뻗어 가슴을 다독입니다. 무슨 꿈을 꾸다가 놀랐을까요. 이렇게 곁에 눕혀 재우니 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든 곧바로 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밤새 아이를 가슴에 눕히거나 팔베개를 하며 재우면, 아이가 자다가 놀란다거나 꿈결에 활갯짓을 할 때에 바로바로 다독일 수 있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곁에서 따숩게 토닥이는 손길에 마음을 놓습니다.
차분히 가라앉은 아이를 바라봅니다. 이제 날이 훤합니다. 밤새 치대고 복닥였으니 아이들은 좀 늦게까지 자겠지요. 깊은 밤에 네 식구 조용히 잠자리에 들면, 집 둘레 논자락에서 목청 돋우는 개구리들 떼울음소리 들을 수 있습니다. 쉬를 누거나 첫째 아이 쉬를 누이러 밖으로 나오면 둘레에서 한꺼번에 터지는 개구리들 떼울음소리가 온몸으로 스며듭니다.
곰곰이 생각에 젖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제법 먼 곳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으레 잠이 깹니다. 집 앞으로 자동차가 지나가도 이 소리가 잠을 깨웁니다. 그러나, 개구리들 떼울음소리는 잠을 깨우지 않습니다. 새벽녘부터 울리는 들새와 멧새 소리도 잠을 깨우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도록 이끄는 소리요, 고단한 몸이면 더 쉬도록 달래는 소리입니다. 봄맞이 제비들 우리 집 처마에 집 손질 하느라 부산을 떨며 내는 소리도 우리 식구들 마음을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소리입니다.
- “누군가, 스승이 있는가?” “아뇨, 없습니다. 자기류지요.” “좋아, 출연 조건은 뭔가? 추, 출연료는?” “출연료? 후후, 그런 건 필요없습니다.” (25쪽)
- “실례합니다만, 셜리 형사님은 아직 연애는 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 일 한 번도 없어! 애당초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붙어서 어울린다니 불결한 데다 시간 낭비야. 그런 것보다 범인을 쫓는 쪽이 훨씬 좋아.” (38쪽)
-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을 거야. 비록 형이라 해도. 유산은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겠어.” “뭣 때문에?” “그건 저주받은 재산이야.” “건방진 소리 마. 어린애 주제에.” “파파가 도박이랑 마약으로 번 돈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을 죽여서 모은 돈이라고!” “사람을 죽여? 누굴 죽였다는 거지?” “형은 파파가 한 일을 모르는 거야? 파파는 말이야, 요 근래 5∼6년 동안 인도차이나에서 배를 타고 탈출한 몇 십만 명이나 되는 난민의 배를 덮쳐서 약탈하는 것이 일이었어. 여자도 아이들도 갓난아기도 가리지 않고 죄다 죽여서는, 시체로부터 몸에 걸친 것들 전부를 빼앗은 거야!” (181∼183쪽)
티없이 살아가는 목숨들이 내는 소리는 맑습니다. 티없으니까 맑겠지요. 돌이키면, 사람 또한 티없이 살아갈 때에 부르는 노래가 맑습니다. 티없이 꿈을 꾸는 사람들 말소리가 맑습니다. 티없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이야기소리가 맑습니다.
내가 노래하는 소리는 해맑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소리는 드맑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말하는 소리는 까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외치는 소리는 메마를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내 입에서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내가 꿈꾸는 무늬대로 내 손에서 글이 샘솟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빛깔대로 내 몸에서 향긋한 내음이 나거나 구린 냄새가 퍼집니다.
아이들 웃음이라서 더 맑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티없이 살아갈 때에 비로소 아이들 웃음이 맑습니다. 어른들 웃음이라서 어둡거나 무겁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어둡거나 무겁게 삶을 짓누르기에 어른들 웃음이 어둡거나 무거워요.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은 사랑 가득한 노래를 부릅니다. 믿음을 부르는 차분하며 고즈넉한 삶은 믿음을 부르는 밥과 옷과 집을 짓습니다. 제 뱃속만 채우려는 시커먼 꿍꿍이는 시커먼 쇳소리를 냅니다. 알량한 재주로 눈속임하는 겉치레는 앙칼진 미운 짓으로 드러납니다.
- “마리코! 응석은 받아들이지 않겠어. 너는 그렇게 함부로 권총이나 공수도를 휘두르고 싶은 거냐? 그런 인민모자 같은 건 벗어던져! 때로는 일류 극장에 멋을 부리고 가 보라고. 내 마음을 모르겠니.” “멋을 부리라고 해도 이거 (옷) 한 장뿐인걸요.” (34∼35쪽)
- “발이나 손! 긴 머리! 그게 무대에서 돋보인다고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나의 도구예요.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발이나 머리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나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요!” (96쪽)
진주목걸이를 한대서 목이 진주가 되지 않습니다. 금가락지를 낀대서 손가락이 금덩이가 되지 않습니다. 은행계좌에 돈을 쌓아놓는대서 가멸찬 살림이 되지 않습니다. 밥상이 휘어지도록 맛난 먹을거리를 차린대서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진주와 같아야 진주다운 삶이요 몸이며 넋입니다. 내 마음이 환하게 빛나야 내 손가락뿐 아니라 내 발가락과 머리카락 모두 환하게 빛납니다. 내 마음에 사랑을 담아야 내 말마디에 따스한 손길 고이 뱁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을 짓는 하루일 때에 늘 넉넉하면서 기쁜 삶을 누립니다.
책을 더 많이 읽어야 똑똑해지거나 훌륭해지지 않습니다. 어떤 훈장을 잔뜩 달아야 거룩해지거나 높아지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상장을 잔뜩 벽에 붙여야 돋보이거나 우러러보이지 않습니다.
똑똑해지자고 살아가는 하루가 아니거든요. 뽐내자며 살아가는 나날이 아니거든요. 이웃을 밟고 올라설 때에 좋은 삶이 되지 않거든요.
아이를 안으며 생각합니다. 아이를 무릎에 누이며 생각합니다. 아이가 먹을 밥을 차리며 생각합니다. 아이가 입을 옷을 개고 빨래하며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말을 걸며 생각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대수로운 대목은 무엇인가. 내 하루에서 가장 빛나는 때는 언제인가. 내 생각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꿈은 무엇인가.
- “카츠라, 카에데. 내가 그린 그림을 제대로 봤느냐? 몇 번을 고쳐 그렸는지 모르겠다만, 이 얼굴에는 죽음의 상이 배어나오고 있다!” “아버지의 기분 탓이에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안 보이는걸요.” “에에이! 너희들의 눈은 옹이구멍이냐. 그러고도 화가 후지타 츠기하라의 딸이라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이걸 봐라! 어느 걸 봐도 죽음의 상이 드러나 있다. 난 말이다, 생명감이 넘치는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다.” (120∼121쪽)
- “언니는 늘 손해라든가 이익이라든가 하는 얘기뿐이네.” “150장이나 수상의 얼굴을 그린다고, 무슨 가치가 있는 거지! 더욱더 많이 다른 그림을 그려서 팔아야 한다고!” “언니는 화상인 카라쿠치 씨랑 약혼하고 나서는 그런 말만 하네.” “난 말이지, 재산이 필요해. 아버지의 아틀리에에 잠들어 있는 다른 그림을 전부 팔면, 10억 엔은 될 거야.” “난 단지, 아버지가 망상에서 해방되어서, 제대로 된 삶을 사시길 바랄 뿐이야.” (124쪽)
- “그 초상화만은 돈을 벌기 위한 속셈으로 그런 거였다. 나는 20년 전, 수상에게서 초상화를 의뢰받았을 때 처음으로 욕심에 눈이 흐려졌다. 이 무슨 한심한 근성이냐. 그때 나는 한심하게도, 어떻게 그려야 기뻐해 줄까, 칭찬을 받을까를, 신경쓰기 시작한 것이야. 내 그림에서는 생명의 빛이 사라져 버렸다. 카에데야, 만약 내가 전 재산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겠니?” “아버지만 행복하실 수 있다면.” (132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칠색 잉꼬》(학산문화사,2011) 첫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이름이니 이렇게 적는다지만, ‘잉꼬’는 어느 새를 가리키는 일본말입니다. ‘鸚哥’를 일본말로 이처럼 읽을 뿐입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사랑새’예요. ‘사랑앵무’라고도 한다지만, 그냥 ‘사랑새’입니다. “七色鸚哥”란 “일곱빛 사랑새”인 셈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책이름은 책이름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 가운데에는 “넘버 세븐”도 있거든요. 이런 이름이야 가벼이 생각하며 지나갑니다. 다만, 한국사람 가운데 새한테 붙이는 이름 하나조차 찬찬히 생각하지 못하는 이가 퍽 많은데, 새이름 하나 살뜰히 생각하지 못하면서 《칠색 잉꼬》라는 만화책 속살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한낱 재미난 만화로만 여길는지, 그저 웃으며 덮을 만화로만 바라볼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재미나게 읽은 다음 덮을 테고, 누군가는 싱겁게 여기며 덮으리라 봅니다. 누군가는 꽤 낡은 작품이라 여길 수 있고, 누군가는 흔한 줄거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삶이란 참 ‘흔합’니다. 으레 ‘누구나’ 아이를 낳아 돌보잖아요. 나도 내 어버이가 낳은 아이요, 우리 아이들은 내가 낳은 아이예요. 어디에서나 갓난쟁이와 어린이를 마주합니다. 어디에서라도 할머니와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흔한 삶, 너른 사람한테서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흔하게 부대끼는 삶에서 사랑이 샘솟습니다. 너르게 마주하는 사람들마다 빛나는 꿈이 있습니다.
- “저기, 이런 생활은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나는 건 어때요? 코우 씨는 배우였잖아요.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요.” “안 돼. 지금 와서 옛날로 돌아갈 수 있겠어. 지금의 나는 이제 쓰레기라고!” “자신을 가지세요.” (73쪽)
- “테츠오, 너는 로라처럼 되고 싶지 않겠지. 언제까지나 엄마가 말한 대로만 움직이지는 마라. 자신의 의지를 가져!” (159쪽)
빼어나다는 연극 솜씨를 선보이는 ‘칠색 잉꼬’이기에 일곱 빛깔 무지개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일곱 빛깔 무지개 같은 얼굴이요 마음이며 삶이에요. 이를테면, 무시무시하다는 독재정권을 휘두른다는 사람도 제 손자 앞에서는 활짝 웃으며 곤지곤지 잼잼 하고 말하지 않겠어요?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손찌검을 하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교사라도 밤에 잠들 때에는 아기마냥 보드라운 낯빛으로 예쁘게 꿈나라로 접어들지 않겠어요?
바람이 붑니다. 봄바람이 붑니다. 봄바람은 마늘밭 마늘잎을 살짝살짝 건드리며 붑니다. 마늘잎은 푸르게 물결칩니다. 봄비 내린 논마다 물이 그득하고, 물이 그득한 논에는 개구리가 웁니다. 개구리 우는 논으로 숱한 새들이 찾아들어 먹이를 얻으려 합니다. 낮 동안 개구리는 조용합니다. 낮에는 온갖 새들이 온 들판과 멧자락을 가득 누비며 갖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바람소리는 누구한테나 바람소리입니다. 풀잎 눕는 푸른빛은 누구한테나 푸른빛입니다. 따사로운 햇살은 누구한테나 햇살입니다. 제비들 삐삐째째 소리는 누구한테나 새소리입니다. 싱그러운 이슬 달린 푸성귀는 누구한테나 푸성귀입니다.
만화책 《칠색 잉꼬》는 사람들 가슴에 곱게 서린 거룩한 보배를 살며시 건드립니다. 사람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거룩한 보배가 어떤 빛깔인가 하고 가만히 이야기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바보스레 움켜쥐려는 힘·이름·돈이란 얼마나 덧없는 보푸라기 같은가 하고 보여줍니다. 그래, 삶은 재미있습니다. 사랑은 즐겁습니다. 꿈은 고맙습니다. (4345.4.26.나무.ㅎㄲㅅㄱ)
― 칠색 잉꼬 1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학산문화사 펴냄,2011.9.25./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