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81 : 삶이 곧 시, 책이 바로 사랑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삼인,2012)를 엮은 이흥환 님은 “대개의 전쟁사가 전투 기록, 전략전술사로만 기술된 군사이거나 전쟁의 배경, 원인에만 치중한 정치사이다. 이런 기록은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생명력이 없는 기록은 그래서 잊히기 쉽다(16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죽었다 하더라도 이들 죽은 넋을 기리거나 돌이킬 수 있어야 역사일 텐데, 막상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죽었다 하는 싸움터 이야기를 들출 때에 으레 남쪽으로 쳐들어왔다느니 누가 나쁜 놈이라느니 하는 목청만 높이기 일쑤예요. 서울 어느 동네에서 마구 철거를 하며 재개발을 하려 들 때에 그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이들 슬픈 넋을 기리거나 달래는 몸짓은 없이 법이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하는 목소리가 드높기까지 해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인걸요. 사람이 모여 이루어지는 마을인걸요.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을 아우른다는 나라인걸요.


  민주와 평화를 바라던 1980년대 어느 날 어느 곳에 몇 천이나 몇 만이라는 숫자가 모였다고 이야기하는 일도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어느 집회나 어느 모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내세우는 일도 썩 반갑지 않습니다.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천이나 만 사람쯤 모여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다문 한 사람이 수요집회를 하더라도 틀림없이 수요집회이고, 이 집회를 몇 분이나 몇 시간에 걸쳐 한다고 적바림할 까닭이 없어요. 한 사람이 모였건 열 사람이 모였건, 모인 사람들 뜻을 살피고, 모인 사람들 삶을 귀기울여 들으며, 모인 사람들 눈망울과 마음결을 함께 읽을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고정희 님 시집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1987)을 다시 읽습니다. 오늘밤 이 시집을 다 읽고 덮을 텐데, 고정희 님이 당신 어머님한테 마지막 옷을 입히며 눈물을 적시는 이야기를 담은 시를 읽다가 “당신 칠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수의를 입히며)”라는 글줄에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흙을 일구던 늙은 어머니 몸과 마음에 깃들던 멧자락과 들판 내음을 맡을 수 있기에 이렇게 시를 썼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삶이 곧 시요, 시가 바로 삶이겠지요. 삶이 곧 글이며 그림이고 사진일 테지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 바로 삶일 테지요. 사랑이 시로 태어나고, 시가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꿈이 글이라는 옷을 입고, 글이 꿈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샘솟습니다.


  일본 전통놀이 ‘카루타’를 삶으로 받아들인 아이들이 나오는 만화책 《치하야후루》(스에츠구 유키 그림) 첫째 권을 읽으면 123쪽에, 카루타 학원 스승이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한테 “100명의 친구가 생겼다고 여기고, 사이좋게 지내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놀이나 경기라는 틀을 넘어, 마음으로 사귀는 좋은 벗으로 지내라는 뜻입니다. 대회에서 1등을 하거나 높은 성적을 거둘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웃음꽃으로 어깨동무할 벗하고 삶을 짓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책읽기는 삶읽기이면서 사랑읽기요 꿈읽기입니다. (4345.4.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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