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꽃송이

 


  새벽에 내린 이슬이 아직 걷히지 않은 아침나절, 아이하고 논둑길을 걷는데, 아이가 “비가 내려서 바지가 젖네.” 하고 말합니다. 아이한테 “비는 안 왔어. 이 물방울은 이슬이야.” 하고 대꾸합니다. 아이는 “이슬이야?” 하고 되묻습니다.


  문득 발걸음 멈춥니다. 이슬방울 알알이 맺힌 들풀을 들여다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동화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가 떠오릅니다.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는 풀잎을 뜯어먹으려 하다가 풀잎이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슬프고 스스로 괴로운 나머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예 굶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느님더러 왜 토끼 저는 이슬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살아가도록 만들지 않았느냐고 하소연을 합니다. 풀잎 하나 건드릴 수 없다고, 아프고 슬프다 하는 토끼 하소연을 듣던 하느님도 토끼마냥 그저 눈물을 흘립니다.


  목숨을 먹는 일은 목숨을 빼앗는 일입니다. 목숨을 먹는 일은 두 목숨이 서로 하나되는 일입니다. 무엇을 먹느냐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고 얽힙니다. 이웃을 한껏 사랑하고 지구별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밥차림과 밥먹기가 아주 다를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먹는 일은 내 몸과 하나될 좋은 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고기로 삼으려고 집짐승을 기르며 모질게 굴거나 값싼 사료와 항생제로 살점을 키운다면, 이렇게 키운 고기가 내 몸을 얼마나 살찌우거나 좋게 하겠습니까.


  더없이 마땅한데, 풀을 먹는 사람이라면 풀에 풀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칠 수 없습니다.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가 고스란히 내 몸속에 들어오잖아요. 고기를 먹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어야 옳지 않을까요. 너른 들판에서 너른 햇살과 바람과 비를 먹으며 자라나는 풀이 더 맛나고 싱그러우며 좋은 밥이 되듯, 너른 들판에서 풀을 뜯고 마음껏 달리며 햇살이랑 바람을 누리는 짐승을 잡아 고기로 마련해야 비로소 ‘고기를 먹어도 내 몸을 살리는 고기’가 되리라 느껴요.


  값싸게 먹는 밥은 내 몸을 값싸게 내동댕이칩니다. 더 적은 돈으로 끼니만 얼추 때우면 그만이 될까요. 그러면, 내 품값도 더 값싸게 쳐도 될까요. 나를 일꾼으로 부리는 사람이 내 품값을 값싸게 후려쳐도 좋을까요.


  값싸게 장만해서 읽는 책은 내 마음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려고 읽는 책은 값싸게 장만하는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값을 알맞게 치러 장만하는 책이어야 하고, 제값을 알맞게 치러 마련한 책꽂이에 즐겁게 꽂아야 합니다.


  새벽에 내린 이슬에 젖은 풀꽃을 아이랑 나란히 바라봅니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 집 풀도감 꽃도감을 뒤지지만, 이 꽃이름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풀도감 꽃도감을 뒤져 ‘자운영’ 한 가지를 새로 압니다. 이슬 머금은 하얀 꽃송이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옆에 나란히 자라는 옅은보라 꽃송이 이름은 알아냅니다. 자운영은 이름을 알고 나서 더 즐겁게 풀잎을 뜯어서 먹습니다. 아직 봉우리 터뜨리지 않은 줄기를 꺾어 냠냠 씹어 보기도 합니다. 풀잎을 뜯고 몽우리를 따면서 스스럼없습니다. 내 몸으로 스며들어 또다른 내 모습이 될 풀이요 꽃이며 목숨이거든요.


  빛나는 꽃송이를 바라보며 빛나는 내 눈길이 되도록 합니다. 빛나는 풀잎과 몽우리를 고맙게 먹으며 빛나는 내 몸과 마음이 되도록 합니다.


  나 스스로 빛나는 생각을 품을 때에 빛나는 내 삶이 될 테지요. 나 스스로 옆지기랑 아이하고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때에 빛나는 내 살림을 꾸릴 테지요.


  사랑을 들려주기에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을 속삭이기에 사랑이 피어납니다. 사랑을 꿈꾸기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4345.4.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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