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과 커피숍
[말사랑·글꽃·삶빛 3] ‘세 가지 말’ 쓰는 한국사람

 


  한국사람은 세 가지 말을 씁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옳게 깨닫지 못합니다만, 한국사람은 세 가지 말을 쓰며 살아갑니다. 첫째,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씁니다. 둘째, 한국사람은 한자말을 씁니다. 셋째, 한국사람은 미국말을 씁니다.


  다시금 말하자면,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이라고 여기는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한자말’, 곧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한자말로 삼아 씁니다. 한국사람은 영국 영어 아닌 미국 영어, 곧 ‘미국사람이 쓰는 말’인 미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말 그대로 한국말이라 할 테지만, 오늘날 한국사람 한국말은 참다이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외국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익힌다 할 때에는 ‘한국말 아닌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척 힘들어 합니다. 외국사람은 ‘한국말’에다가 ‘한자말’이랑 ‘미국말’을 함께 배워야 하는 만큼, 자그마치 세 나라 말을 한꺼번에 익혀야 해요. 이는 서양사람이 일본말을 익힐 때에 한자까지 익혀야 하느라 힘들어 하고, 중국말을 익힐 때에도 한자를 나란히 익혀야 하니 힘들어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말만 배울 때에는 일본말이나 중국말이나 힘들지 않아요. 말을 담는 글까지 함께 배우려 하니, 글이 한 갈래가 아니라 힘들어 합니다. 일본사람은 히라가나하고 가타가나만 써도 넉넉하지만, 여러모로 한자가 깃들면서 곱배기로 글을 익히고 맙니다. 중국사람도 이와 같아요. 그래서, 중국사람 가운데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한자’를 모르고 ‘중국말’을 하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거꾸로, 한국에도 ‘한글’을 모르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아직 꽤 있어요.

 

 ㄱ. 한국말
 ㄴ. 한자말
 ㄷ. 미국말

 

  무엇보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 쓰는 말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을 모르고도 말을 한다지만, 좀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을는지 모르는데, 참말 말을 모르고도 말을 하는데, 스무 살이 되건 서른이나 마흔이나 쉰 살이 되건, 한국사람은 스스로 말을 옳고 똑똑히 익히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옳게 알지 못하는 스물이나 서른 살이라 한다면, 이 나이에 사랑하는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은 뒤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말을 익히지만, 이에 앞서 제 어버이한테서 말을 익혀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 말투와 말씨를 물려받아요. 제 어버이가 옳고 바르게 말하는 매무새라면 아이들 또한 옳고 바르게 말하는 매무새예요. 제 어버이가 핀란드사람이면 핀란드말을 물려받아요. 제 어버이가 몽골사람이면 몽골말을 이어받아요. 제 어버이가 경상도사람이면 경상도말을 물려받겠지요. 제 어버이가 서울사람이면 서울말을 이어받을 테고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그릇된 말투로 말을 하더라도 ‘그릇된 줄’ 모르고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거칠거나 일그러진 말글을 일삼더라도 ‘거칠거나 일그러진’ 줄 모르며 이어받습니다. 아이들이 뇌까리는 막말은 모두 어른들이 으레 뇌까리는 막말이에요. 그러니까, 요즈음 아이들이 바르고 참다우며 좋고 보드라이 말하기를 바란다면, 어른들부터 누구나 바르고 참다우며 좋고 보드라이 말하도록 삶을 고치고 바로잡으며 추슬러야 합니다.


  마흔이나 쉰 살이 되어도 내 말글을 다스리지 못하면, 또 예순이나 일흔 살이 되어도 내 말글을 다스리지 못하면, 내가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한테 잘못된 말투나 뒤틀린 말씨를 물들입니다. 귀여운 손자 손녀를 만난 자리에서 ‘엉터리로 뿌리내린’ 말투를 들려주면 귀여운 손자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서 ‘엉터리로 뿌리내린’ 말투를 배워요. 일흔이나 여든 살 나이라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을 옳게 살피고 바르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한테 슬픈 모습을 물려줄 뿐 아니라, 비틀리거나 일그러지거나 잘못된 말로 살아가는 어른부터 스스로 비틀리거나 일그러지거나 잘못된 매무새가 몸에 박힌 채 떨어지지 않으니 더없이 슬프거든요.

 

 ㄱ. 찻집
 ㄴ. 다방
 ㄷ. 커피숍

 

  한국사람은 세 가지 말을 쓴다고 밝혔습니다. 첫째, 한국말로는 ‘찻집’입니다. 둘째, 한자말로는 ‘다방(茶房)’입니다. 셋째, 미국말로는 ‘커피숍(coffee shop)’입니다. ‘차’라는 말은 ‘茶’라는 한자라 하지만, “차를 마셔요” 하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 이 낱말이 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는 그냥 ‘차’입니다. 그러나 ‘다방’이라 할 때에는 달라요. ‘다방’이 무엇인지 알자면 ‘다’와 ‘방’이 어떤 낱말인가를 새롭게 새겨야 합니다. ‘커피숍’도 이렇게 말마디를 하나하나 뜯어 살펴야 합니다.


  빵집을 두고 ‘빵집’이라 하면 빵을 파는 곳입니다. ‘제과점(製菓店)’이라 하면 낱말을 뜯어야 합니다. ‘베이커리(bakery)’라 할 때에도 새삼스레 낱말을 뜯어야 해요. 언제부터인지 스며든 ‘브런치(brunch)’라는 미국말 또한 낱낱이 뜯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한자말로 ‘점심(點心)’이라 했지만, 예부터 익히 ‘낮밥’이라고들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침-낮-저녁’이듯 ‘아침밥-낮밥-저녁밥’이기 때문입니다. 시골 흙일꾼만 ‘낮밥’이라 말하지 않았어요. 말놀이 삼아 ‘아점’이라고도 했는데, 옳게 말놀이를 했다면 ‘아낮’이라 해야 올바르겠지요. 그러니까, ‘브런치’는 한국말 아닌 미국말이면서 한국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낱말입니다. ‘점심’이나 ‘다방’이나 ‘제과점’은 한국말 아닌 한자말이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여느 한국말을 잊은 채 이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이리하여, 한국말을 배우려 하는 외국사람은 이 낱말들을 모조리 외워야 합니다. 세 갈래 말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한국사람하고 사귀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살피지 못하고 제대로 가누지 않은 나머지, 이제 ‘커피숍’하고 ‘다방’하고 ‘찻집’은 다르다 여기는 사람이 생깁니다. ‘낮밥’이랑 ‘점심’이랑 ‘브런치’는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이 생깁니다. 이와 함께, ‘부엌’이랑 ‘주방(廚房)’이랑 ‘키친(kitchen)’은 모두 다르다 여기는 사람이 생겨요.


  한국사람 스스로 틀을 세웁니다.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무언가를 문화나 문명으로 누릴 때에는 서양에서 쓰는 낱말을 써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 문화나 문명 또한 서양말을 고스란히 살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한국사람은 겉모습은 한국사람이지만,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나누던 삶과 매무새를 스스로 잃습니다. 낱말도 잃지만, 낱말을 엮는 말투와 말씨 또한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나 ‘과거분사’ 꼴이 없는데, 영어를 배우고 외국말을 익히면서 그만 ‘현재진행형 번역 한국말’이나 ‘과거분사 번역 한국글’을 써요. 일본사람이 일본말을 하며 붙이는 ‘の’를 섣불리 ‘-의’라는 토씨로 바꾸어 아무 곳에나 쓰는데다가, 미국사람이 미국땅에서 미국 이웃이랑 주고받을 때에 쓰던 미국말을 거침없이 받아들입니다.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중국 이웃이랑 주고받거나, 일본사람이 일본땅에서 일본 이웃이랑 주고받던 한자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맞아들입니다.

 

 사랑방 안방
 곳간 뒷간

 

  곰곰이 생각하면, 한국말에는 ‘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느 고을에서 여느 흙을 일구던 여느 사람들 여느 살림집에는 ‘방’이 없었어요. 한자말로 ‘초가삼간’이라 했어요. 여느 사람들은 한자를 안 쓰고 한국말만 썼으니, 여느 사람한테는 그저 ‘풀집’이지만, 여느 사람을 바라보던 지식인과 권력자는 중국글을 빌어 ‘草家三間’이라 적었습니다. 곰곰이 옛 흙집을 헤아립니다. 옛 흙집에는 참말 ‘방’이 없습니다. 중국글 ‘草家三間’처럼, 한국땅 여느 한국사람 살림집은 ‘간(칸)’만 나눕니다. 곳간, 뒷간, 정지간처럼 이야기했어요. ‘사랑방’이나 ‘안방’은 기와를 얹은 집에서 살아가던, 돈과 이름과 힘이 있던 사람들 살림새입니다. 이들은 중국글을 들여와서 누리던 사람이요, 중국글을 들여와 중국글로 집살림을 가리켰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늘날 아파트에는 ‘중국글인 한자’ 아닌 ‘서양글인 영어(또는 미국말)’로 이름을 붙입니다.


  나한테는 외국에서 살다 한국으로 온 벗이 없어 잘 모릅니다만, 한국에 찾아와 한국사람을 사귀는 외국사람은 여러모로 머리가 아프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하나를 보러 간다 할 때에도, 한국사람은 ‘영화’라는 말마저 안 써 버릇해요. ‘무비’에다가 ‘씨네’라고까지 합니다.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노래’라는 말을 안 쓰고 ‘음악(音樂)’이라는 한자말이랑 ‘뮤직(music)’이라는 미국말을 써요. 노래를 조금 손질하는 일, 이를테면 ‘노래고치기’를 놓고 예전에는 ‘편곡(編曲)’이라는 한자말로 가리켰지만, 요사이는 미국말 ‘리메이크(remake)’를 무척 널리 씁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한국땅 삶자락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좋은 한국사람을 동무나 이웃으로 사귀면서 내 넋과 얼을 아름다이 빛내거나 북돋우는 길을 살피지 않습니다.
 (4345.4.2.달.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고양이 2012-04-03 11:00   좋아요 0 | URL
사방으로 찔리는 좋은 글이세요...
배워온 것도, 지금 접하고 읽는 것들도 다 섞인 말들이라 어렵네요. ㅠ

숲노래 2012-04-03 16:12   좋아요 0 | URL
워낙 모두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좋게 다스리기'란 어려울 노릇이지만,
'좋게 다스리는 삶과 말'을
이야기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그대로 굳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