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8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놀이는 누구한테서 배워?
 [만화책 즐겨읽기 125] 데즈카 오사무, 《불새 (8)》

 


  놀이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해서 즐깁니다. 놀이는 아이들이 서로서로 어울리는 동안 스스로 생각해서 즐깁니다. 놀이는 아이들이 둘레 어른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배운 그대로 생각해서 즐깁니다.


  놀이책에 이런 놀이 저런 놀이가 실리니까, 이 책을 읽으며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놀이교사가 놀이를 이모저모 가르쳐 주니까, 교사한테서 배운 대로 놀이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스스로 놉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놉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에 알맞게 놉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누리는 마을과 보금자리에 따라 예쁘게 놉니다.


- “이쿠오, 잘 지냈니?” “응, 엄마.” “자, 선물. 열흘 간 얌전히 집 잘 지킨 상이란다. 이 스위치를 눌러 보렴. 어서. 50 종류의 그림이 스크린에 나타나지. 조합을 통해서 마음대로 얘기를 바꿀 수 있어. 어때? 재미있지?” “좋아요. 엄마. 그런데 언제 놀아 줄 거예요?” “글쎄, 언제가 될까? 호키, 내 스케줄이 어떻죠?” (15쪽)
- “로비타는? 나, 로비타가 보고 싶어. 로비타한테 갈래.” “이쿠오, 그렇게도 로비타가 좋으냐? 우리들이 네 부모잖아? 로비타는 인간이 아니야. 어째서? 이쿠오!” (31쪽)

 

 


  사랑은 사람들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 나눕니다. 어떤 책에 적힌 대로 사랑을 나누는 일이란 없습니다. 연속극이나 영화를 보고서 사랑을 꽃피우는 일이란 없습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며 꽃피우는 사랑입니다. 생각이 살아숨쉬고 마음이 자라나며 이루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들려주는 책이 있기에, 이 책 몇 권 읽고 나서 사랑을 불태우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가슴에서 싹을 틉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바라는 사람들 손길에서 자라납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 몸짓에서 잎을 틔웁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내 어버이를 사랑하고 내 아이를 사랑합니다. 내 마을을 사랑하고 나를 둘러싼 너른 들판과 멧자락과 바다를 사랑합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마시는 바람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누리는 물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받아들이는 햇살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곱게 드리우는 나무 그늘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갓난쟁이 기저귀 빨래를 사랑합니다.


- “와, 로비타.” “도련님, 또 외톨이이십니까?” “저기, 로비타. 여러 가지 놀이 방법을 알던데 누구한테서 배웠어?” “놀이는 누구한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내는 겁니다.” (18쪽)
- “너, 너를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럼 그 할아버지가 약속대로 나를 네 몸속으로 보내준 건가?” “레오나, 이제 우리들은 함께예요.” “물론이지. 마음이 하나니까. 자아, 치히로, 네 마음속에 내 마음을 잘 붙여 줘.” (106쪽)

 

 


  책을 읽으니 이야기를 꽃피우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오래 다니니까 이야기가 샘솟지 않습니다. 극장에 가거나 놀이공원을 드나들었으니 이야기가 자라나지 않습니다. 큰 회사에 다니거나 공장에서 땀을 흘렸으니 이야기가 쏟아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놀이를 빛낼 때에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스스로 기쁘게 사랑을 나눌 때에 이야기가 거듭납니다.


  내가 내 옆지기랑 나누는 이야기는 서로 돌보며 일구는 삶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아이들하고 나누는 이야기는 다 함께 좋아하며 아끼는 삶에서 얻습니다.


  갓난쟁이 죽을 끓이며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아이들 밥상을 차리며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걸레질을 하고 비질을 하며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들 씻기고 옷가지 빨래하는 사이 이야기가 날갯짓 합니다. 나란히 서서 들길을 걷는 동안 이야기가 노래합니다. 파랗게 물드는 하늘에 하얗게 스며드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이야기가 흐드러집니다. 나뭇잎을 스치고 풀잎을 살랑이는 봄바람을 맞이하며 이야기가 춤춥니다.


  내 삶이 좋은 삶입니다. 좋은 삶이 내 삶입니다. 내 삶이 좋은 이야기입니다. 좋은 이야기가 내 삶입니다.

 

 


- “젊은이, 나는 아직 내 연구를 완성시키지 못했네. 그 완성이란, 인간끼리 합체시키는 것이지! 두 인간의 육체를 섞어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내 최후의 목표라네! 지금 그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준비가 끝났네! 자네와 보스는 내일이면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다! 내가 이 멋진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너무 두근거려서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라고!! 헤헤헤! 헤헤헤!” (96쪽)
- “알겠나, 선생? 이것만은 말해 두겠어. 어떤 과학의 힘이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쳇, 위대한 철학자 나섰군!” “우주를 방황하다 보면 도를 터득하게 되거든. 인간의 생명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거야.” (119쪽)


  사랑은 삶에 뿌리를 내리고, 놀이는 삶에 깃을 둡니다. 말은 삶에서 태어나고, 꿈은 삶에 손길을 내밉니다. 아이는 기계 부속품이 아니기에 어머니가 몸속에 열 달을 곱게 품습니다. 아이는 공장 톱니바퀴가 아니기에 어머니가 온 사랑을 들여 낳습니다. 아이는 어른들 놀잇감이 아니기에 어머니가 피와 살을 낸 젖을 물립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마을 다 다른 보금자리에서 다 다른 어머니들 젖을 물며 씩씩하게 자랍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사랑을 다 다른 빛깔로 받아먹으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품에 안습니다. 그런데,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른 빛깔이 어리는 다 다른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어머니와 아버지가 으레 잊거나 잃습니다. 다 달리 사랑할 아이들을 다 똑같이 틀에 가두고 말아요. 다 다른 아이들이 품으며 누려야 할 아름다운 누리에서 아이들이랑 오붓하게 살아가려 하지 않아요.


  어른들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어른들은 일하느라 바쁘다 합니다. 어른들은 문화를 누리고 예술을 즐기며 사회에서 복닥이며 정치를 지키고 경제를 건사하며 철학을 빚고 운동경기로 고단함을 풀다가는 할인마트에서 시름을 달래요. 어른들은 아이들 손을 잡고 노래하는 마실길을 잊습니다. 어른들은 자가용을 몰며 텔레비전을 봅니다. 어른들은 조그마한 손전화로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이랑 목소리 곱게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재미나게 놀이를 새로 빚으며 아이들이랑 어깨동무하지 않습니다.

 

 


- “여보,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 나라에서 큰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고, 한 번 쏘면 몇 만 명도 넘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서? 게다가 바다는 독이 퍼지고, 산과 들고 말라 버렸다면서?” (168쪽)
- “딸아, 불쌍한 내 딸아. 이 엄마는 1500년 후 미래에서 살고 있었단다. 그곳엔 모두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났고, 고아였던 이 엄마는 수용소에 들어갔었지. 그 시대를 증오했어. 그리고 인간을. 그때, 엄마는 이상한 새를 봤지. 꿈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 새의 몸은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어. 그리고 내 소원대로 옛날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돌아오고 싶어질 때까지 있어도 된다고 했어. 믿을 수 없었단다. 그 대신 과거의 역사를 바꾸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엄마의 옷이, 이 시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 섬유의 역사가 변한다. 그리고 딸이 태어났고, 만약 네가 자라나면, 엄마는 미래인이 낳은 아이가 하나 생기는 거야.” (180쪽)


  놀이를 스스로 빚지 못하는 어른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빚으려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채 빚지 못한 때에 일찌감치 틀에 가둡니다. 보육원과 어린이집과 유치원이라는 틀에 아이들을 가둡니다. 이윽고 초등학교라는 틀에 가둡니다. 시험공부와 영재교육과 조기교육과 독서함양이라는 틀에 가둡니다. 아이들은 곧바로 대입시험이라는 틀에 사로잡힙니다. 푸르디푸른 넋을 꽃피울 꿈을 스스로 접고야 맙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마치 살아갈 값어치가 없기라도 한 듯 스스로를 옥죕니다. 어른은 곁에서 아이를 부채질합니다. 어른은 옆에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른은 둘레에서 아이를 다그치고 채찍질합니다. 사랑으로 놀이하고, 사랑으로 일하며, 사랑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 여덟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아이로 태어나 푸른 꿈과 맑은 사랑을 빛낸 나날을 누린 적이 있는 줄 떠올리지 못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어른들부터 당신이 아이였을 적에 푸른 꿈을 못 누리고 맑은 사랑을 못 빛냈는지 몰라요. 오늘날 어른들부터 당신이 아이였을 적에 슬픈 사슬에 매이고 고단한 틀에 사로잡히고 말았는지 몰라요. 오늘날 어른들은 스스로 아름다운 누리를 일군다든지 사랑스러운 터전을 보듬으려는 꿈을 안 꾸는지 몰라요.


  나한테 꿈이 없대서 아이들마저 꿈이 없어도 되지 않아요. 나한테 사랑이 없다지만 아이들까지 사랑이 없는 채 살아도 되지 않아요.


  죽음을 앞둔 사람한테 돈을 잔뜩 갖다 안길 때에 기뻐하지 않겠지요. 이제 막 태어난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선물한다면 좋아하지 않겠지요. 다섯 살 아이는 누구하고 어디에서 무얼 하며 놀고 싶을까요. 열다섯 살 아이는 어디에서 누구랑 어깨동무하며 땀흘려 일하고 싶을까요. (4345.3.8.나무.ㅎㄲㅅㄱ)


― 불새 8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4.2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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