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플리 Suppli 1
오카자키 마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무엇을 하느라 바쁘거나 힘들까
 [만화책 즐겨읽기 67] 오카자키 마리, 《서플리 (1)》

 


 꿈을 한참 꾸다가 잠을 깹니다. 꿈을 누비던 나는 꿈속 이야기가 꿈이라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습은 내가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내 마음이 꿈을 지어 꿈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갔구나 싶습니다. 나 스스로 지은 이야기가 내 꿈속에서 펼쳐졌구나 싶습니다. 문득 떠올리면, 나는 내 꿈에서 본 모습을 으레 꿈 아닌 삶에서 맞딱드리곤 합니다. 어느 때인가 불현듯 ‘어, 오늘 이곳 이 모습은 내가 언젠가 꿈으로 꾼 모습인데.’ 하고 느낍니다. 엊저녁 네 식구 집에서 복닥거리던 모습도 언제였는 지 잘 모르지만 틀림없이 꿈으로 만난 모습, 아니 꿈에서 살던 모습입니다.

 

 꿈을 꾸고 난 이듬날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가 바라기에 이렇게 꿈으로 어떤 이야기를 살아낼는지 모르고, 내가 꿈으로 살아낸 이야기는 언젠가 내 눈앞에 다시금 펼쳐진다면, 내 목숨은 내 꿈처럼 이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꿈을 꾸는 동안 내 삶을 고이 꾸릴 수 있달까요. 아마, 언젠가 내 삶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갈 무렵이 가까우면 내가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이야기가 꿈으로 나타나겠지요. 나는 내 삶을 꿈으로 그리고, 내 죽음도 꿈으로 그리겠지요.

 

 


- ‘제조회사에서 일하는 그와는 학창시절부터 사귄 사이로, 내 나이 벌써 27살이니 햇수로 7년이나 사귄 셈이다. 어쩌면 이무렵 그가 왜 그런 소리를 꺼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면 뭔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년이라는 세월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둔하게 만들어 교착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8∼9쪽)
-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엔 문득 생각하게 된다. 헤어질까?’ (19∼20쪽)


 꿈을 꾸지 않는다면 살아가지 못하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예쁜 꿈을 꾸지 않는다면 예쁜 삶을 못 누리는 셈 아니랴 싶습니다. 꿈을 잊거나 꿈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나날이라면, 도무지 살아가는 뜻이나 보람이 없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꿈을 품지 않거나 꿈을 이루려는 사랑이 없는 하루라면, 내가 먹는 밥이란 어떤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사람이라 한다면, 꿈을 꾸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고단한 몸을 누여 가만히 눈을 감고 꿈을 꾸는 하루를 잇기 때문에 사람살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괴로운 꿈이든 즐거운 꿈이든, 아픈 꿈이든 밝은 꿈이든, 꿈을 꾸면서 삶을 누리리라 생각합니다.

 

 곧, 사람들이 꿈속에서 조금 더 밝은 나날을 짓는다면, 사람들이 꿈속에서 서로 어깨동무하는 밝은 누리를 짓는다면, 사람들이 꿈속에서 사랑과 믿음이 얼크러진 아름다운 나라를 짓는다면, 참말 꿈속에서뿐 아니라 삶으로도 시나브로 좋은 모습과 반가운 이야기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꿈을 꾸지 않거나 슬픈 꿈을 자꾸 꾸기에, 삶으로도 너무 모질거나 힘겹거나 슬프리라 생각합니다.

 

 


-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 (27∼28쪽)
- ‘헤어진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에 끼어들 수 없게 되는 거였어.’ (132쪽)


 오카자키 마리 님 만화책 《서플리》(대원씨아이,2006) 첫째 권을 읽습니다. 《서플리》에 나오는 스물일곱 살 아가씨는 참 슬픈 넋입니다. 이른바 일본 도쿄라 하는 곳에서 제법 잘나간다 싶은 사무직 일꾼으로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정작 이 아가씨한테 ‘삶’이란 없고 ‘꿈’ 또한 없습니다.

 

 그저 ‘일’ 한 가지만 있다 할 텐데, 이 일이라 하는 한 가지조차 ‘삶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 ‘도시 물질문명 톱니바퀴가 되어 기운을 쏙 빼야 하는 몸부림’이로구나 싶어요. 카피라이터, 커리어우먼, 이런저런 이름이란 무슨 값을 할까요. 집이란 잠자는 곳일 뿐이고, 집에서 아무 꿈을 꾸지 못하는데, 이러한 삶은 어떤 즐거움일까요. 아가씨가 사귀는 남자친구란, 아저씨들이 사귀는 여자친구란, 서로서로 얼마나 좋은 동무이자 이웃일까요. 입으로 읊는 사랑이란 참말 사랑이 맞을까요. 몸으로 스치며 맡는 살내음이란 지친 ‘일’을 쉬거나 달래거나 잊는 새로운 몸부림이 아닌가요.

 

 삶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쳇바퀴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톱니바퀴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않습니다.

 


- ‘헤어지고 아직 4달 남짓. 한 마디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단 얘긴데.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바보 같은 난. 물론 평일엔 서로 시간이 어긋나고 휴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아서 크리스마스고 생일이고 근로자의 날이고 모두 회사에서 보내긴 했지만.’ (105쪽)
- ‘자신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만들어졌고 그게 “남자에 적합한” 것이 아니란 건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일.’ (155쪽)


 그런데 나는 얼마나 내 꿈을 예쁘게 꾸나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꿈을 그럭저럭 꾼다면, 좋은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와 아이들 꿈은 어느 만큼 예쁘게 꾸나 모르겠습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거나 힘들다며, 막상 살붙이들과 예쁘게 얼크러지는 꿈은 뒤로 젖히거나 잊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배불리 먹어도 같이 배불리 먹을 살붙이입니다. 배고프게 지내도 같이 배고프게 지낼 살붙이입니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늘 함께 할 살붙이입니다. 아름답거나 우스꽝스러운 일 또한 노상 함께 나눌 살붙이예요.

 

 커다랗다 싶은 꿈이든 작다 싶은 꿈이든 서로 얼싸안는 살붙이입니다. 머나먼 꿈이든 가까운 꿈이든 서로 기대고 믿는 살붙이입니다.

 

 남자친구(또는 여자친구)에서 애인이 되든, 직장동료에서 남자친구(또는 여자친구)가 되든, 그리 다를 구석이 없습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이 없으면 자리를 어떻게 옮기더라도 덧없습니다. 서로 보살피는 손길이 따스하면 자리가 어떠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 “지금 힘든 건 다 젊고 예쁘기 때문이야. 기운 내.” (161쪽)
-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 좋아 보이지 않아요?” (208쪽)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으레 말합니다. ‘일밖에 모른다’고. 그렇지만 난 달리 느낍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을 한다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느라 온삶을 바칠’ 뿐, 정작 ‘제 삶을 사랑하며 즐거이 누리는 길’하고는 동떨어졌다고 느낍니다. 돈은 잘 벌고 꽤 그럴듯하게 치레하는 옷을 입었으며 퍽 멋스럽다 싶은 비싼 아파트에서 산다지만, 즐거이 먹고 즐거이 입으며 즐거이 자는 삶이 아니라, 오로지 돈을 버는 삶뿐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좋아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돈을 벌려고 부르는 노래라면 얼마나 슬플까요. 스스로 좋아해서 영화배우나 연예인 일을 하는 삶이 아니라 돈을 버는 영화배우나 연예인이라 한다면 얼마나 쓸쓸할까요. 스스로 좋아해서 영업사원이 되거나 기획부원이나 관리부원이 되지 않고 돈을 버는 기획부원이나 관리부원으로 젊은 나날을 송두리째 바친다면, 이렇게 보낸 젊은 날은 어떻게 적바림하고 무슨 이야기가 남을 수 있을까요.

 

 봄이 되어 봄을 누리고 여름이 되어 여름을 누립니다. 날마다 다른 삶이요 날마다 다른 꿈입니다. 내 지난날을 더듬으며 하루하루 새롭게 빛내는 이야기가 있다면 삶입니다. 내 오늘을 헤아리며 언제나 새롭게 맞이하는 좋은 하루라고 느낀다면 삶입니다.

 

 밥그릇 숫자가 적으니까 젊음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며 즐겁게 땀을 흘릴 때에 젊음입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며,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을 품기에 젊은이입니다. (4345.3.5.달.ㅎㄲㅅㄱ)


― 서플리 1 (오카자키 마리 글·그림,채혜원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06.11.15./4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