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살아가는 자리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8] 서영기, 《명료한 오후》(안목,2011)

 


 미국에서 집짓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서영기 님이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 《명료한 오후》(안목,2011)를 읽습니다. 책 끝에 붙인 서영기 님 글에 “(새로운 일터에서) 그 4년 동안(지금도 그렇지만), 점심을 먹고 나서 남는 시간 동안, 거의 매일, 공장 주변을 돌아다녔어요. 많은 상념 속에 카메라를 메고요. 특별하게 어떤 장소를 찾아다니지는 않았고, 그저 주어진 시간 내에 가능한, 공장 주변 한 바퀴. 출퇴근 시간에도 사진을 찍었지만 중요한 작업은 점심 후 30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실립니다. 일터 둘레에서 늘 마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요, 곰곰이 살피면 ‘내가 남을 바라본 모습’이라 할 수 있으나 ‘남이 나를 바라본 모습’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눈부신 한낮 아주 환한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스치는 모습을 사진으로 마주합니다. 문득, 이 사진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일하는 사람’, 곧 ‘노동자’로구나 싶습니다.

 

 굳이 ‘일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봅니다. 일을 쉬는 사이사이 돌아다니며 마주하던 사람들이 으레 ‘일하는 사람’이요, 눈부신 한낮 아주 환한 길가에서 마주하는 이들 또한 으레 ‘일하는 사람’이로구나 싶어요.

 

 

 ‘일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으니 ‘노동자’ 권리라든지 지위라든지 현실을 밝히려는 사진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일하는 사람’이 꽤 자주 서영기 님 사진에 얼굴을 비출 뿐입니다. 더욱이, 생각을 다시금 기울이고 또 기울이노라면, 우리들 누구나 ‘일하는 사람’입니다. 가게에 들러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공장에서 망치질을 해야만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밥하고 빨래하며 살림 돌보는 사람 또한 ‘일하는 사람’이에요.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가리켜 ‘일하는 사람’이라 말할 사람은 없을까요. 그러나, 아기를 보살피는 어머니 또한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해야 맞습니다.

 

 흙손으로 시멘트 바닥을 반반하게 미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이요, 쓰레기를 줍거나 치우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교통순경도 초등학교 교사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가게에서 물건값 셈하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이며, 꽃집에서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이에요. 낮밥을 먹고 나서 사진기 어깨에 걸치고는 길거리를 걷는 서영기 님 또한 ‘일하는 사람’입니다. 30분 즈음 일손을 놓고 쉰다 해서 ‘일 안 하는 사람’이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똑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서영기 님은 《명료한 오후》에서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그건 다른 세계를 슬쩍 엿본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인데, 그 모습들은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세계처럼 보인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아름답다, 단지 바라보고,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흐뭇하면 즐거운 나날이요,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나날이니, 스스로 기쁘게 찍는 사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빛나는 사진입니다. 더없이 환하게 빛나는 내 삶입니다.

 

 사진기를 쥐며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내 보금자리에서 사진을 빚습니다. 스튜디오는 곧 내 보금자리요, 내 보금자리는 바로 사진관입니다. 길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길이 내 삶터입니다. 내 삶터는 바로 길이에요. 길을 거닐며 삶을 누리고, 길을 거닐며 삶을 돌아보며, 길을 거닐며 삶을 사랑합니다.

 

 집에서 아이들 기저귀를 빨래하는 어버이는 집이 좋은 사랑터이면서 좋은 사진을 빚는 꿈터입니다. 까르르 웃는 아이를 찍고, 무언가에 깊이 빠져든 아이를 찍으며, 으앙 우는 아이를 찍습니다. 뜀박질하는 아이를 찍고,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를 찍으며, 책을 읽는 아이를 찍습니다. 밥먹는 앞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머리띠를 꽂는 옆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세발자전거를 슬슬 끄는 뒤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1분 겨를을 내어 사진을 찍습니다. 30초 말미를 내어 사진을 찍습니다. 10초 짬을 쪼개어 사진을 찍습니다.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가야산, 계룡산, 속리산, …… 같은 데에서만 사진을 예쁘게 찍을 만하지 않습니다. 한강, 낙동강, 섬진강, 금강, 영산강, 남한강, …… 같은 데에서만 사진을 어여삐 찍을 만하지 않습니다.

 

 마을 텃밭에서도 사진을 예쁘게 찍을 만합니다. 마을 바닷가에서도 사진을 어여삐 찍을 만합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도 사진을 즐겁게 찍을 만합니다. 우리 집 건넌방에서도 사진을 기쁘게 찍을 만합니다.

 

 

 서영기 님은 “Brooklyn, Queens, Jersey city. 이들 지역이 제게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 생활의 자리가 이러한 곳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고 얘기해요. 살아가는 자리가 사진을 찍는 자리요, 사진을 찍는 자리가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살아가기에 생각합니다. 생각하기에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사진으로 이 좋은 사랑을 담으며 살아갑니다.

 

 내 좋은 꿈은 나를 살찌우는 밥과 옷과 집이 깃든 사랑스러운 마을에서 활짝 웃으며 천천히 빚습니다.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마시면서 꿈을 빚습니다. 흙을 밟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꿈을 빚습니다. 별빛이 나를 감쌉니다. 무지개가 나를 어루만집니다. 들새 목소리와 풀벌레 노랫소리가 나를 얼싸안습니다. (4345.2.29.물.ㅎㄲㅅㄱ)


― 명료한 오후 (서영기 사진·글,안목 펴냄,2011.10.8./25000원)
http://anmoc.com 에서 이 사진책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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