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유전

 


다시 말해서 그것은 위험할 만큼 사람들의 정념(情念)을 격세유전적으로 동원해서 과거의 제국주의나 식민지주의의 기억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강상중/이경덕,임성모 옮김-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1997) 13쪽

 

  ‘그것은’은 ‘이는’으로 손봅니다. ‘위험(危險)할’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무서울’이나 ‘무섭다 할’로 손볼 수 있어요. “사람들의 정념(情念)”은 “사람들 생각”이나 “사람들 마음”이라 하면 안 될까 생각해 봅니다. 꼭 ‘정념’이라는 말을, 게다가 묶음표에 한자까지 곁들여서 써야 할까 궁금합니다. ‘동원(動員)해서’는 군대말입니다. 이런 군대말은 되도록 안 써야 좋다고 느껴요. 여기에서는 ‘이끌어서’나 ‘끌어들여’나 ‘들며’로 고치면 좋겠습니다. “과거(過去)의”는 “지난날”로 다듬고, “기억 속으로”는 “기억으로”로 다듬으면 돼요.


  ‘격세유전(隔世遺傳)’은 “생물의 성질이나 체질 따위의 열성 형질이 일대(一代)나 여러 대를 걸러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곧, 어떤 모습이 그 다음에도 잇달아 오래도록 나타난다고 하는 ‘격세유전’이라 할 만합니다. 생물학으로 치면, ‘열성 유전자’가 여러 대에 걸쳐 나타나는 모습이고, 이 보기글에서는 사람들 마음속에 ‘너희 겨레는 덜 떨어지는 겨레야, 이런 덜 덜어찌는 모습은 너희 뒷사람한테도 똑같이 나타나.’ 하는 어딘가 잘못되거나 비틀린 생각을 심으려 한다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의 정념(情念)을 격세유전적으로 동원해서
→ 사람들 마음을 열성 유전자가 대물림된다는 생물학으로 끌어들여
→ 사람들 마음에 열성 유전자가 대물림된다는 생각을 집어넣어
→ 사람들한테 너희는 어차피 못난 겨레라는 말을 엉터리로 들먹이며
 …

 

  생물학에서 쓰는 격세유전인 만큼 이 낱말을 쓰지 말자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생물학을 다루는 자리가 아니라 아무 데에나 쓴다면 어떠할까요. 다른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부모한테서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격세유전적 특징
→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특징
→ 어버이한테서 이어받은 모습
→ 어버이가 물려준 모습
 …

 

  어버이한테서는 ‘좋은’ 유전자이든 ‘나쁜’ 유전자이든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유전자를 물려줍니다. 그런데,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유전자를 놓고 ‘좋다-나쁘다’ 또는 ‘우성-열성’이라 나누어야 하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보기글에 나온 “격세유전적 특징”은 ‘열성 유전자가 드러난다’는 뜻으로 쓴 글월이 아닙니다. 그저 ‘어버이가 아이한테 시나브로 물려주는 유전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곧, ‘물려받다’나 ‘이어받다’나 ‘대물림하다’ 같은 낱말을 넣으면 넉넉해요. 다른 보기글을 더 살펴봅니다.

 

 전통의 격세유전을 통해서 기지개를 켤지 모른다
→ 전통을 물려받아 기지개를 켤지 모른다
→ 전통을 이어받아 기지개를 켤지 모른다
 …

 

  ‘전통에서 열성 유전자를 물려받’으면서도 기지개를 켠다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열성이냐 우성이냐’ 하는 대목이 아닌 ‘전통에서 물려받는다’는 대목을 드는 글이라 하겠지요.


  그러니까, 한자말 ‘격세유전’을 쓰는 분들은 이 말뜻을 옳게 헤아리며 쓴다 하기 어렵구나 싶어요. 쉽게 말해 ‘물려받다’라 하면 넉넉한데, 쉽게 말하지 않는 셈이구나 싶어요. 보기글을 하나 더 살펴봅니다.

 

 감수성이 격세유전을 한다
→ 감수성이 이어진다
→ 감수성이 이어간다
→ 감수성이 대물림된다
→ 감수성이 고스란히 이어진다
 …

 

  학문을 하며 써야 하는 낱말이라 한다면,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쓸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학문을 하는 자리에서도 한결 쉽게 주고받을 낱말을 살핀다면 훨씬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느 자리에서는 여느 자리대로 쉽고 알맞으며 어여삐 말을 하고 글을 쓰면 좋습니다. 학문을 하는 자리에서는 학문 자리대로 더 쉽고 알차며 곱게 말을 하고 글을 쓰면 훌륭합니다.


  말 한 마디로 삶을 빛냅니다. 글 한 줄로 꿈을 키웁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랑을 북돋웁니다. 글 한 줄로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