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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가자 - 겨울 ㅣ 도토리 계절 그림책
윤구병 글, 이태수 그림 / 보리 / 1997년 4월
평점 :
자연을 담는 그림으로 빚는 책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31] 이태수·윤구병, 《우리끼리 가자》(보리,1997)
나는 그림책을 1999년에 비로소 읽었습니다. 1998년 12월을 끝으로 대학교에 휴학계를 내고는 ‘대학교 자퇴 선언’을 했어요. 모두 다섯 학기를 다닌 대학교인데, 군대를 마치고 곧장 그만두고 싶었으나 두 학기를 더 다녔고, 두 학기를 더 다니면서 대학 교육이 한 사람한테 얼마나 도움이 안 되는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껴, 배움값으로 돈을 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돈보다 ‘돈까지 치르며 내 젊음을 흘려버리는’ 일이 몹시 슬프며 싫었어요. 대자보를 큼지막하게 하나 써서 붙이고, 학과방에 편지를 남깁니다. 대학교 그만두는 사람이 쓴 대자보는 누군가 금세 뜯어서 치웠고, 내가 남긴 편지도 금세 쓰레기통에 처박힙니다. 모두들 졸업장을 따려고 애쓰는 판이니, 대학교 그만두는 목소리는 스며들 구멍이 없었구나 싶어요.
돌이켜보면, 대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1999년뿐 아니라 2009년이나 2019년까지도 그림책을 읽지 않으며 살았을는지 모릅니다. 혼인해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림책에는 눈길조차 안 두며 살았을는지 모릅니다. 혼인을 하지 않았으면 그림책을 읽었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고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돌리기를 하며 조용히 일하던 1999년 봄에 그림책을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얽매인 사슬이 없고, 옥죄는 밧줄이 없으니, 참으로 홀가분하게 그림책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봄, 내가 새벽에 일어나 돌리는 신문에 난 조그마한 책소개 기사 하나 눈에 뜨였습니다. ‘세밀화로 그린 도토리 계절 그림책’ 가운데 봄 이야기인 《우리 순이 어디 가니》가 나왔다는 기사입니다. 신문기사를 가위로 오립니다. 하나는 내가 건사하고 하나는 대학교 앞 구내서점 아저씨한테 가져가서 보여주며, 이 책을 갖추어 달라고 말합니다.
한 주쯤 기다린 끝에 책을 받습니다. 이무렵 신문돌리기 한 달 일삯으로 삼십만 원을 받았고, 이 가운데 십육만 원은 적금을 부었어요. 십사만 원으로 한 달 살림돈을 삼으니 하루치 살림돈을 고스란히 들이는 책입니다. 도서관에 얘기해서 책을 받아 빌려읽을 수 있으나, 이 그림책은 꼭 사서 읽고 싶었습니다. 품에 안고 싶어요. ‘그림책이라니? 그림책이라니?’ 하고 생각하면서 내 품으로 꼬옥 안으며 읽고 싶었어요.
책방에서 책을 받아 신문자전거 짐바구니에 넣습니다. 오르막을 낑낑대며 오르며 신문사지국으로 돌아옵니다.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넘깁니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읽으며 굵다란 눈물방울 톡톡 떨굽니다. 여러 시간 걸쳐 그림책 한 권 여러 차례 아주 천천히 읽으며 새깁니다.
이날 뒤로 도서관이나 새책방이나 헌책방으로 마실을 다니며 그림책을 꼼꼼히 둘러봅니다. 도서관과 새책방에서는 갓 나온 그림책을 살피고, 헌책방에서는 나라밖 그림책이랑 사라진 옛 그림책을 돌아봅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무렵에 나온 그림책은 몹시 드물지만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1960년대에도 그림책이 더러 나온 자취를 찾습니다. 1950년대 한국 그림책도 어쩌다 구경합니다. 1960년대 과학잡지에 실린 ‘일본 작품 베낀 만화’를 훑습니다.
스스로 책을 이모저모 찾으며 읽는 동안, 한국땅 어른들이 한국땅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베풀려고 애쓴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깨닫습니다. 1990년대를 넘어서며 겨우 그림책이 싹텄다 할 만하고, 2000년대를 넘어서며 나라밖 그림책이 펑펑 쏟아지듯 나온다 할 만해요. 1980년대 그림책은 으레 일본 그림책을 저작권계약 안 하고 낸 판이기 일쑤였는데, 이나마 전집으로 묶어 파는 책들이었으니, 내 국민학생 무렵에는 나뿐 아니라 내 동무들도 그림책을 읽으며 자랄 수 없었겠구나 싶습니다. 살림돈 넉넉해서 그림책을 전집으로 선물할 만한 또래동무는 한둘 있을까 말까였으니까요.
.. 동물 마을에 겨울이 왔어. 하루는 아기토끼가 동무들을 불러모았어. “우리 산양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 들으러 갈래?” “그래, 그래.” 곰이랑 다람쥐랑 멧돼지랑 너구리랑 족제비랑 노루랑 모두모두 좋아했어 .. (6쪽)
1999년 봄에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처음 만나고서 그림책에 눈을 뜬 나는, 1999년 여름에 이 그림책을 펴낸 출판사에 들어갑니다. 늙어 죽는 날까지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밥을 먹으며 살아가려나 생각했는데, 신문을 돌리며 읽던 《작은책》이라는 잡지에 난 ‘출판사 새 일꾼 받음’ 알림글을 살피다가 ‘학력 따지지 않음’이라는 말에 끌려 입사지원서를 냈어요. 나는 고졸이거든요. 고졸을 쓰겠다는 일터는 드물거든요.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펴낸 출판사에 들어간 뒤, 《바빠요 바빠》가 태어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봅니다. 이 그림책들 간기에 ‘영업부 일꾼 이름’이 빠진 대목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얘기한 끝에 내 이름 석 자도 1쇄와 2쇄를 찍을 때에는 조그맣게 나란히 실립니다. 책은 편집부 일꾼 땀방울로만 빚지 않거든요. 책을 알리고 책방에 깔며 사람들한테 파는 영업부 일꾼뿐 아니라, 출판사 살림을 맡는 관리부 일꾼하고, 인쇄소와 제본소를 오가며 꼼꼼히 살피는 제작부 일꾼 땀방울까지 그러모아 빚어요.
《바빠요 바빠》 3쇄를 찍을 무렵에는 이 일터를 그만둡니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길들이려 하는 사람들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없습니다. 좋은 그림책 하나가 아이들을 ‘좋은 길로 길들이는 가르침’이 아니라 한다면, ‘좋은 책을 빚으려는 일이란 일터 사람들을 틀에 맞추는 부속품으로 여기는 굴레’여서는 안 되니까요.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이랑 그림책에 글을 넣는 사람은 온누리를 두루 살피는 몸가짐이어야 합니다. 이 그림책 읽을 아이들 눈높이와 삶과 꿈을 톺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그림책 장만해서 아이들과 즐길 어른들 눈길과 살림살이와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주인공만 돋보이게 그릴 수 없습니다. 그림책 뒷자리를 이루는 자잘한 그림은 허술하게 그릴 수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담을 그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이 빚을 그림입니다.
.. 커다란 떡갈나무를 지나는데, “아참, 난 도토리를 모아야 해. 그래야 겨울을 날 수 있어.” 아기다람쥐가 나무 위로 쪼르르 올라가는 거야. “그럼 우리끼리 가자.” “그래, 그래.” .. (11쪽)
그림책 《심심해서 그랬어》와 《우리끼리 가자》와 《우리 순이 어디 가니》와 《바빠요 바빠》는 ‘세밀화로 돌아보는 봄·여름·가을·겨울’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차례를 보면, 여름 겨울 봄 가을, 이렇게 나왔어요. 철에 맞추어 고우며 보드라운 붓결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도시사람들 누구나 잊거나 멀리하는 살가운 자연과 들판과 논밭과 멧골을 보여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부터 읽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살아갈 아이들이 읽도록 마련한 ‘세밀화 계절 그림책’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났거나 시골에서 살아가는 어른이나 아이들 읽으라고 마련한 그림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골마을 시골어른과 시골아이는 애써 그림책을 들추지 않아도 되니까요. 들판이 그림책이고, 멧자락이 그림책이에요. 밭고랑이 그림책이고, 바닷가 갯벌이 그림책이에요. 하늘이 그림책이며, 햇살이 그림책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이 그림책들을 아주 신나게 팔았습니다. 스물다섯 살 젊은 사내는 서른 서른다섯 아줌마들한테, 또 마흔 마흔다섯 아줌마들한테 이 그림책들을 매우 바지런히 팔았어요. 영업부 일꾼으로 열한 달 일하면서 이 그림책들만 해도 여러 천 권 팔았지 싶습니다. 나는 아줌마들한테 이 ‘세밀화 계절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읽히면 ‘(도시) 아이들한테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 하는 꿈과 사랑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득 다시 생각합니다. 내가 이 그림책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밟는 땅은 땅이라기보다 시멘트길이거나 아스팔트길입니다. 맨흙을 복복 소리 느끼며 밟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일터를 오가든 학교를 다니든, 비오는 날 질척거리는 흙이 신에 잔뜩 엉겨붙으며 걷는 일이 없습니다. 풀포기 마음껏 자라나는 흙땅에서 뒹굴 일이 아예 없습니다. 자연은 온통 그림책에만 담깁니다. 내 둘레 어디에도 자연이란 없는데 그림책에만 자연이 싱그럽다는 빛깔로 펄떡펄떡 숨쉽니다.
자연을 꼼꼼하게 살피고 꼼꼼하게 담는 그림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릴 때에 ‘세밀화’라는 이름 그대로 ‘꼼꼼그림’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은 사진하고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나타낼 수 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그림은 어느 한 구석 안 빠뜨리거나 허술히 안 다룰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옛날 옛적 갓날 갓적에…….” 산양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시작했어. 아기토끼는 어느 틈에 잠이 들고, 산 속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단다 .. (26쪽)
한국에 여우는 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여우를 보자면 동물원에 가야겠지요. 그런데, 동물원에서 바라보는 여우를 그림으로 담는다 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차디찬 시멘트 감옥에 갇힌 사람을 그릴 때하고, 드넓은 논밭에서 구슬땀 흘리는 사람을 그릴 때에는 어떠한 느낌이 될까요. 갇힌 짐승과 홀가분한 들짐승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할까요.
그림책에 여우를 담으려면, 도토리 가득 주둥이에 물은 다람쥐를 그리려면, 멧골을 누비는 곰을 보여주려면, 먹이를 찾는 크고작은 멧돼지를 만나려면,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세밀화 계절 그림책’ 만드는 곳에서 일했기 때문에, 헌책방을 부지런히 쏘다니면서 다케타쓰 미노루(竹田津 實)라는 분이 담은 사진책 《北邊の原野を驅ける キタキツネ》(平凡社,1974)를 장만했습니다. 이밖에 숱한 일본 사진책과 그림책을 꾸준히 구경하고 장만했습니다. 내가 1999년에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던 무렵이나 그 뒤로 오랫동안 다케타쓰 미노루라는 이름은 한국에 거의 안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몇 가지 책이 한국말로 옮겨지는데, 막상 이분 사진책이 한국에서 새롭게 나오거나 알알이 알려지지는 않습니다. 훗카이도 동물병원 이야기만 나돌 뿐입니다. 이분 다케타쓰 미노루 님은 들여우를 보살피기도 하고 들여우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여우들이 들판에 굴을 파며 새끼를 낳고 살아가거든요. 일본 사진쟁이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 님은 《Grizzly》(平凡社,1985)를 비롯해서 북극곰 한삶을 사진으로 숱하게 찍어서 남겼습니다. 일본에도 곰이 있습니다만, 더 너르며 홀가분한 터전에서 어여삐 살아가는 목숨을 마주하고 싶기에 애써 북극까지 찾아가 북극곰을 만나요.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책 또한 어린이 그림책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찬찬히 알아채며 사랑할 수 있었어요.
나는 ‘세밀화 계절 그림책’ 네 권 가운데 《우리끼리 가자》를 가장 좋아합니다. 겨울빛을 가장 곱게 담아낸 한국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한국에서는 《우리끼리 가자》만큼 겨울빛을 예쁘게 보여주는 그림책이 아직 없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 그림책 《우리끼리 가자》에는 몇 가지가 없습니다. 곱고 정갈하다 할 만한 그림이지만, 눈부신 빛살이 없습니다. 온누리 하얗게 덮을 만큼 소복히 내리는 눈은 몹시 눈부십니다. 눈이 그친 맑은 하늘은 아주 눈부시고, 파란 빛깔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은 온누리를 하얗게 밝힙니다. 온통 하야면서 아주 또렷합니다. 눈이 가득 덮인 멧자락 오르는 이들은 까만안경을 쓰곤 하는데, 예전에는 눈안경이라고 ‘실눈 뜨듯 길쭉하게 틈을 벌린 종이 안경’을 썼다고 해요. 눈부신 빛살과 눈더미 빛결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거든요.
햇살이 구름에 가려 눈이 펑펑 내릴 때에도 온누리는 무척 또렷합니다. 환하고 또렷합니다. 바람이 되게 몰아칠 때에는 무시무시하게 춥지만, 바람이 잠자며 눈발만 쏟아질 때에는 소리가 잦아들고 둘레가 포근합니다. 멈춘 듯한 그림이 눈앞에 드넓게 펼쳐집니다.
한여름에는 한여름대로 들판과 멧자락이 푸른 빛으로 눈부시도록 또렷합니다. 봄가을에는 봄가을대로 들판과 멧자락과 마을이 봄빛과 가을빛으로 눈부시도록 환하면서 또렷합니다.
이제 아이들과 복닥이는 나날을 보내는 어버이로 살아가면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세밀화 계절 그림책’을 읽히며 가만히 되짚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세밀화 계절 그림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방문을 열고 대청마루에서 바깥을 내다 보기만 해도 ‘세밀화보다 더 꼼꼼하며 촘촘히 드러나는 봄철 여름철 가을철 겨울철 자연 삶자락’이 펼쳐지거든요. 애써 그림책까지 뒤적이면서 자연을 따로 찾아야 하지 않아요.
곧, 이 그림책들, ‘계절 그림책’이 되든 ‘세밀화 그림책’이 되든 ‘자연 그림책’이 되든, 그림책이란 도시에서 태어나서 살아갈밖에 없는 아이들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꽁꽁 갇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뻗지 못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따로 만들어야 하는 빚이로구나 싶어요. 자연을 밀어 없앤 자리에 ‘자연을 담은 그림책’을 놓습니다. 숲을 밀어 없앤 자리에 ‘숲을 베어 만든 그림책’을 놓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어깨동무하며 몸소 느끼도록 하는 ‘자연책’이 아니라 ‘자연을 베고 공장을 돌려 만드는 책’을 지식과 정보로 아이들한테 읽히며 길들이는 어른입니다. 숲을 아끼고 돌보는 ‘숲책’이 아니라 ‘숲을 밀어 아파트 짓고 학교 짓고 건물 짓는 도시살이를 감추며 길들이는 책’을 자연사랑 이야기꾸러미로 내미는 어른입니다.
나부터 내 삶을 돌이키면,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며 도시에서 사는 동안 ‘세밀화 계절 그림책’을 예쁘다 하고 느낄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멀찍하게 떨어진 시골에서 시골사람으로 지내는 하루하루 누릴 때에는, 시골자락 시골길과 시골숲을 굳이 사진으로 찍지 않더라도 늘 온마음으로 즐깁니다. 아이들과 활짝 웃으며 서로서로 자연이 되면 서로가 서로한테 좋은 삶책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하대서 《우리끼리 가자》를 비롯한 ‘세밀화 계절 그림책’이 나쁘거나 뜻없다고 느끼지 않아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가잖아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헤어나려고 힘쓰지 않잖아요. 너무도 많은 어른들이 도시에서 버티고 살아가면서 이녁 아이들을 도시사람으로만 키우잖아요. 아이들은 스스로 깨우쳐 도시 굴레와 도시 사슬을 풀 수 있어요. 아이들은 그만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며 어른들이랑 똑같이 구르다가 어느 날 문득, 《우리끼리 가자》 같은 그림책을 읽다가 아주 가느다란 실마리 하나를 붙잡고는 ‘이제부터 내가 참다이 사랑하며 착하게 살아갈 길을 열자’ 하면서 생각을 바꿀 수 있어요.
나한테 《우리끼리 가자》는 자연을 그림책으로만 보며 내 삶은 정작 도시에 그냥 버티고 눌러앉는 하루가 얼마나 바보짓인가 하고 느끼도록 도와준 길동무입니다. 도시에서 부대끼던 때에는 가까이에 이 그림책들을 놓았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오늘은 이 그림책을 책시렁 한쪽에 얌전히 모셔놓습니다. (4345.2.10.쇠.ㅎㄲㅅㄱ)
― 우리끼리 가자 (이태수 글,윤구병 그림,보리 펴냄,1997.3.15./7500원)
덤. 지난날, 출판사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들한테 받은 글줄.
내 생일 기념으로 책에다 글 한 줄씩 남겨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