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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와 도둑쥐 ㅣ 내 친구는 그림책
오오토모 야스오 글 그림 / 한림출판사 / 1989년 9월
평점 :
절판
훔치는 마음과 빼앗는 마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30] 오토모 야스오, 《너구리와 도둑쥐》(한림출판사,1989)
누군가한테서 무언가 빼앗으면, 빼앗은 사람은 어떤 삶을 누리고 빼앗긴 사람은 어떤 삶을 이을까 헤아려 봅니다. 예부터 때린 사람은 잠을 못 이루고, 맞은 사람은 두 발을 뻗고 잔다 했는데, 빼앗은 사람은 잠을 못 이루고, 빼앗긴 사람은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빼앗으려 하는 사람은 무언가 안 가졌기에 빼앗을 마음일까요. 빼앗기는 사람은 무언가 가졌으니 빼앗겨야 하나요. 제대로 못 가졌거나 넉넉히 못 가졌기에 다른 사람한테서 무언가 빼앗아야 비로소 배를 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요.
빼앗기는 사람은 빼앗기더라도 삶을 이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빼앗는 사람은 자꾸자꾸 빼앗고 또 빼앗아야 삶을 누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빼앗으며 돈과 이름과 힘을 누리는 이들은, 이 돈과 이름과 힘으로 얼마나 좋은 삶을 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가 가진 무언가를 훔치는 이들은, 이렇게 훔쳐서 그야말로 기쁘거나 즐겁거나 반갑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 “앗! 누가 집 안에 들어왔었구나!” “감자자루가 없어졌어요!” “콩도 마구 흘려놓고 갔어요!” .. (4쪽)
너무 배고픈 나머지 이제 견디지 못해 훔치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고프지 않을 뿐더러 배고픔을 겪지 않았으나, 버릇처럼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세다며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없기에 주눅들며 올려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어서 돈으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벌고 다시 벌어도 돈이 그예 줄줄 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토모 야스오 님이 빚은 그림책 《너구리와 도둑쥐》(한림출판사,1989)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야기 얼거리는 산뜻하고 재미나다 할 만하지만, 아이들한테 이 그림책을 읽을 만한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이 지구별에 워낙 훔치는 사람 많고 워낙 빼앗기는 사람 많아, 참 슬프며 안타까운 일이 끝없이 벌어집니다. 도둑쥐가 훔친 감자랑 콩은 아무것 아닙니다. 도둑쥐한테 감자와 콩을 빼앗긴 너구리는 아무것 아니에요. 이처럼 서로 사이좋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지구별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요.
나는 어릴 적부터 ‘소값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내 어린 나날을 보낸 1980년대부터 두 아이와 살아가는 2010년대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소값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1980년대 첫무렵부터 2010년대 첫무렵까지 하나하나 살피면, 1980년대는 1990년대보다 값이 나았다 할 만하고, 1990년대는 2000년대보다 값이 나았다 할 만해요. 다만, 숫자로 치면 이렇다뿐, 해마다 자꾸 떨어지는 소값이니까 ‘예전을 생각한들 하나도 나은 삶’이지 않아요.
새로 찾아올 해에는, 또 다시 찾아올 해에는, 이 다음이나 그 다음 해에는 소값이 얼마나 더 떨어질는지 모르는데, 올해에는 숫젖소 한 마리 값이 고작 1만 원까지 떨어졌어요. 소 한 마리 값 1만 원이란 그야말로 웃기지 않은 값이요 터무니없는 값이지만, 거짓말이 아닌 값이에요.
누가 이렇게 소값을 떨어뜨릴까요. 이렇게 소값이 떨어지면 누가 뒤에서 돈을 챙길까요. 이렇게 소값이 떨어지면 누가 눈물을 흘릴까요. 어느 한쪽이 돈을 번다면 어느 한쪽은 돈을 잃겠지요. 다 함께 돈을 버는 삶이 아니라, 한쪽은 빼앗기고 한쪽은 빼앗는 삶이 더 골 깊어지겠지요.
.. 화가 난 너구리 가족은 뛰어가 쥐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 (13쪽)
그림책에서 너구리는 감자농사와 콩농사를 짓습니다. 그림책에서 쥐는 너구리가 지은 감자랑 콩을 훔칩니다. 쥐는 이밖에도 너구리네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훔칩니다.
자연 터전에서 살피면, 너구리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자연 터전에서 살피면 쥐는 놀잇감이나 뜨개실을 훔치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그린 분은 빗대어 말하려고 너구리와 쥐를 들었겠지요.
그림책을 읽으며 어쩐지 내키지 않습니다. 아니, 이 그림책에서 너구리와 쥐를 바꾸어 놓아야 비로소 우리 터전하고 걸맞다 할 만한 이야기, 곧 ‘우화’가 되지 않으랴 싶어요.
작은 쥐들이 서로서로 두레를 하며 애써 감자랑 콩을 지었더니, 너구리 식구들이 이 감자랑 콩을 훔쳐 가는 줄거리일 때에 비로소 걸맞으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이들은 ‘작은 쥐’처럼 ‘힘이 여리고 이름이 없으며 돈이 없’는 목숨입니다. 소값을 비롯해 돼지값이나 쌀값이나 배추값이 떨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흙일꾼입니다. 도시에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나 쌀이나 배추를 사먹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샛장수나 농협이나 정부기관이 무너지거나 쪼들린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흙일꾼은 농약을 마시며 숨을 끊지만, 농협 일꾼이나 샛장수 가운데 스스로 숨을 끊을 만큼 가난에 시달리거나 ‘애써 흘린 땀방울을 빼앗기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어요.
.. 얼마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너구리가 말했습니다. “좋은 수가 있어요. 감자를 연못으로 옮겨 주세요.” 모두가 힘을 모아 감자를 날랐고 엄마너구리는 연못에서 감자를 씻었습니다 .. (19쪽)
이 그림책은 얼거리가 달라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힘없는 쥐들이 지은 곡식을 너구리가 훔치고, 쫄쫄 굶으며 괴로운 쥐들이 너구리를 찾아가서는, 슬기를 맑게 빛내어 너구리를 꾸짖고, 너구리를 꾸짖은 다음 ‘더 슬기로운 사랑’으로 너구리한테 ‘너구리 너희들이 손수 흙을 일구면 싸울 일도 아플 일도 없지 않겠니?’ 하고 타이르는 얼거리로 거듭나야 한다고 느낍니다.
꼭 아이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라서 이렇게 얼거리를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 눈길로도, 여느 어른 눈길로도, ‘포식자 너구리’가 ‘여린 목숨 쥐’를 너그러이 봐준다는 흐름은 어딘가 얄궂구나 싶어요. 마치 임금님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굽어살핀다는 느낌이에요.
.. “집을 짓겠다고?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그러자면 우선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하는 설계도가 필요하지.” 아빠너구리가 한 마디 하자 쥐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했습니다 .. (23쪽)
너구리이든 쥐이든 사람이든, 좋은 생각을 꽃피우면서 좋은 삶을 일굽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가멸찬 사람이든, 밝은 꿈을 키우면서 밝은 삶을 나눕니다. 어린이이든 어른이든, 따순 사랑을 보듬으면서 따순 삶을 누려요.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서로서로 기쁜 하루입니다. 서로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고마운 나날입니다.
밥 한 술 나누는 사랑을 아이들과 누리고 싶어요. 천천히 함께 호미질을 하면서 밭을 일구고 싶어요.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으려는 어른들은 생각과 마음과 꿈과 사랑을 조금 더 따스하면서 너그럽고 포근하고 어여삐 북돋우면 좋겠어요. (4345.1.31.불.ㅎㄲㅅㄱ)
― 너구리와 도둑쥐 (오토모 야스오 글·그림,이영준 옮김,한림출판사,1989.9.30./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