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가 걷는 길

 


 옆지기와 아이들이랑 마실을 다닌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마실을 간다. 택시를 불러 탈 수 있지만, 바닷가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버스를 탄다. 그런데 버스는 포구로 갈 뿐, 모래밭 있는 바닷가로는 가지 않는다. 포구에서 내리니 바닷가까지는 몇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한단다.

 

 옆지기는 둘째를 업고 나는 첫째 손을 잡고 걷는다. 첫째는 요리조리 장난스레 걷다가 졸린 나머지 안아 달라 말한다. 첫째를 안고 걷자니 처음에는 괜찮으나 이내 아이 무게가 꽤 묵직하다고 느낀다. 참 많이 컸구나, 참 튼튼히 자라는구나, 앞으로 네가 안길 날은 얼마 안 되겠구나 싶다.

 

 그나저나, 아이들과 걸을 만한 흙길이 너무 적다. 모든 길은 자동차가 다니기 좋도록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깐다. 사람들은 밑창 두툼한 신을 신는다. 멧자락을 오르든 논둑이나 밭둑을 걷든, 온통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곱고 넓게 깔린다. 흙과 풀을 밟으며 바닷가를 거닐거나 멧자락을 오르내릴 수 없을까. 꼭 이렇게 자동차 다니기 좋도록 온누리에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뿌려야 할까.

 

 모든 목숨이 살아갈 수 있는 밥을 얻자면 흙땅이 있어야 한다. 풀은 흙땅에서 돋는다. 풀 먹는 짐승을 잡아먹는 큰 짐승은 ‘흙에서 나는 풀을 먹는 짐승’이 있어야 살아가니까, 큰 짐승도 흙을 밟고 누려야 목숨을 잇는다. 우리에 가두어 기르는 소나 돼지나 닭 또한 풀이 있어야, 풀이 돋는 흙이 있어야 목숨을 잇는다. 풀을 즐겨먹을 사람이든 고기를 즐겨먹으려는 사람이든, 풀이 돋는 흙을 누려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누빌 풀 돋는 흙땅이 자꾸 줄어든다. 사람들은 자동차가 씽씽 재빨리 달릴 길만 신나게 새로 닦는다. 새 다리를 놓고, 새 굴을 뚫는다. 새 기찻길을 놓고 새 찻길이 뻗는다. 자전거 달릴 길이라서 아스콘을 깔 까닭이 없다. 흙길을 반반하게 다지면 된다. 걸을 만한 길이면 자전거로 달릴 만한 길이다. 빨리 달리는 내기를 해야 하지 않으니, 아늑하거나 푸근하게 돌보면 좋은 길이다. (4345.1.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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