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6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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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치와 종교는 모두 하나, 쓰레기
 [만화책 즐겨읽기 103] 데즈카 오사무, 《불새 6》

 


 아이 둘을 데리고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까지 다녀오는 길은 멀고 길었습니다. 시골마을 어느 이웃은 서울부터 고흥까지 자가용을 일곱 시간 몰았다고 하는데, 요즈음은 고속버스를 타면 네 시간 반이나 네 시간 오십 분 즈음이면 달릴 수 있습니다. 어디이든 서울부터 달리는 길은 가장 짧습니다. 시골과 시골 사이를 달리는 길이 가장 멉니다. 서울부터 부산까지, 또 서울부터 광주까지는 짧아요. 이와 달리 밀양에서 상주를 간다든지, 문경에서 원주를 간다든지, 아산에서 부여를 간다든지, 장흥에서 나주를 간다든지, 함양에서 임실을 간다든지 한다면, 이러한 길은 그닥 멀지 않으나 아주 긴 품과 겨를을 들여야 합니다.

 

 설을 맞이해 네 식구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를 두 차례 갈아타고, 마지막으로는 택시를 탑니다. 어차피 힘겨운 마실길이라면, 여관에서 하루 묵으며 천천히 가기보다는 내처 시외버스를 타자고 생각했습니다. 여관에서 묵는들 바깥에서 밥을 먹어야 하니 그리 좋을 일 없지 않느냐고 여겼습니다. 사이에 묵는 곳이란, 호젓하거나 조용한 시골마을 아닌 도심지가 될 테니, 홀가분한 마실길이 되기는 어려우리라 여겼어요.

 

 집을 떠나면 고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타야 하는 찻길이기에 멀미를 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찻길은 고즈넉하며 싱그러운 숲길이 아니라, 자동차 가득한 고속도로나 시내 한복판이니까 고된 일이 됩니다. 숲을 느끼고 숲바람을 마시면서 알맞게 달리는 시골길이라 한다면, 아이나 어른이나 멀미를 적게 하거나 안 하리라 생각합니다. 더 빨리 더 앞질러 달리는 고속도로나 시내 한복판일 때에는 그리 빠르지 않은 자동차를 타더라도 멀미를 하거나 메스껍거나 어지러울밖에 없구나 싶어요.


- “아니, 그렇지 않다. 짐이 코우치현의 지식사에 들렀을 때 그곳의 본존을 보며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의 난국을 헤쳐 나가자면 커다란 불상을 만드는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고.” “흐음.” “온 나라 안의 쇠붙이를 모아 불상을 만들고, 온 나라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 절을 짓고, 불교를 전국 방방곡곡에 퍼뜨려 우리 나라를 불교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9쪽)


 사람들이 얼마 안 타니까, 군과 군 사이를 잇거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차편이 마땅하지 않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군과 군 사이를 제법 자주 오가며, 마을과 마을 사이를 퍽 자주 드나듭니다. 다만, 오늘날 사람들은 가까운 길을 나서든 좀 먼 길을 나서든 자가용을 타요. 스스로 자동차를 몰아요.

 

 사람들 스스로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가는 길이라면 자전거로 오갈 만합니다. 자전거로 오갈 만한 길은 때때로 버스를 타고 오갈 만합니다.

 

 경제를 발돋움하는 길을 그닥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정치하는 이들이 참말 지역살림, 곧 지역경제를 헤아리고 싶다면, 자가용을 줄여야 마땅합니다. 자가용을 몰도록 하면서 자가용에 붙는 세금을 거두지 말고, 이를테면 등록세를 비롯해 기름값에 붙는 세금이라든지 갖은 세금 벌어들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들이 마을버스를 타며 치르는 찻삯으로 세금을 천천히 벌어들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을버스를 타고 오가면서 마을에 머무는 동안 마을가게에서 느긋하게 돈을 쓰도록 하며 세금을 천천히 그러모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가용을 몰아 더 크게 꾸미고 더 값싸게 물건을 파는 할인마트에 가서 장보기를 한다면 지역살림에 얼마나 보탬이 될까요. 자가용을 몰아 더 큰 이웃 도시로 물건을 사러 다닌다면 지역살림에 얼마나 이바지를 할까요.

 

 자가용 씀씀이를 줄이지 않을 때에는 지역살림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 석유 씀씀이를 줄일 수 있을 때에 지역살림이 제대로 살아나는 길이 트입니다. 석유로 만든 물건을 줄이고, 집에서 석유를 쓰는 일을 줄일 때에 지역살림이 살아나는 한편, 내 보금자리 살림 또한 살아나요.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돈을 모으지 말고, 흙을 밟는 보금자리랑 텃밭 일굴 땅뙈기 마련하는 데에 돈을 써야 내 살림살이와 마을 살림살이가 살아납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 땅이 아닌 내 목숨과 식구들 목숨을 사랑하는 땅을 일구고 갖추어야 서로서로 아름다이 살아갈 수 있어요.


- “대체 죽어서 뭐가 되시겠다는 거예요!” “아왕아.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을 게다. 종교 따위 쓸모없고 돈 한 푼 되지 않는다고.” “그런 대사님이 스스로 죽어 짐승이 되려는 겁니까?” “정치를 위해 이용되는 종교는 너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다. 그때 너를 옥에 놔두고 내가 일부러 도망친 이유를 알겠느냐? 그것은 네가 겪을 시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가 그 고통스러운 시련을 견뎌냈을 때 네 마음속에 진짜 부처를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네가 낳은 부처는 너만의 것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고 아무도 훔칠 수 없는 것이다.” (53∼54쪽)
- “네, 아왕 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그분 주위에는 언제나 작은 새와 짐승들이 모여든답니다.” “새와 짐승들도 모두 아왕 님을 흠모하고 있다는 증거죠.” (70쪽)


 나는 느낍니다. 오늘날 정치는 모두 쓰레기라고 느낍니다. 보수를 외치건 진보를 외치건 오늘날 모든 정치는 한통속 쓰레기에서 허덕인다고 느낍니다.

 

 정치가 쓰레기통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삶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길을 찾아야 비로소 쓰레기통 정치에서 벗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하고, 몸으로 움직여 스스로 살아야 하며,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모두 예쁘게 살아가도록 이끌거나 도와야 합니다.

 

 밥다운 밥을 먹어야 살림다운 살림입니다. 옷다운 옷을 입고, 집다운 집을 거느려야 합니다. 일다운 일을 하고, 놀이다운 놀이를 즐길 수 있어야 해요. 학교다운 학교에서 배움다운 배움을 맞아들여야 해요.

 

 밥다운 밥이란 무엇일까요. 학교급식이면 되나요? 값싼 푸성귀라면 되나요? 내 몸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밥이란 어떤 먹을거리로 마련해서 차릴 때에 밥다운 밥이 되면서 내 몸을 살리거나 살찌울까요.


- “벌레고 물고기고 금수고 죽으면, 모두 똑같아! 인간이 부처가 된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부처다!” (65쪽)
- “대불이 예술이라고? 흥!” “전국에서 사람들이 대불을 참배하러 몰려올 거야. 그리고 내 이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겠지. 그것이야말로 예술가 최고의 명예 아니겠어?” “오빠는 여기저기서 가뭄으로 사람들이 바짝바짝 말라 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시끄러워! 난 내 힘을 엄청난 일에 시험해 보고 싶어.” “이까짓 거 만들어 봤자 가뭄은 끝나지 않아! 뭐가 부처야! 웃기지도 않아.” (92∼94쪽)


 오늘날 종교는 온통 쓰레기라고 느낍니다. 이쪽 종교이든 저쪽 종교이든, 종교라는 옷을 입을 때에는 하나같이 쓰레기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린다고 느낍니다.

 

 종교가 쓰레기구덩이에서 쓰레기를 걸치지 않으려면,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아끼고 믿으며 살아갈 길을 찾아야 바야흐로 쓰레기구덩이 종교에서 뛰쳐나온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로서로 아끼고 믿으며 살아갈 길이 어떠한 데에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야 하고, 온마음으로 살아내야 하며,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나란히 아리땁게 살아가도록 거들거나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밥다운 밥을 먹자고 말해야 종교다운 종교입니다. 옷다운 옷을 스스로 지어 장만하거나 이웃이 애써 지은 옷다운 옷을 제값 치러 장만하자고 말해야 종교다운 종교입니다.

 

 어깨동무하는 착한 길을 찾고 함께하며 나눌 때에 종교입니다. 손을 맞잡는 즐거운 일과 놀이를 살피며 서로서로 웃음꽃을 터뜨려야 시나브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참선도 수행도 고행도 묵상도 기도도 아닙니다. 참선은 참선이고 수행은 수행입니다. 고행은 고행이고 묵상은 묵상이며 기도는 기도예요. 종교는 종교가 되는 길을 걸어야 올발라요. 종교는 종교가 되는 자리를 찾아야 알맞아요.

 

 나는 내가 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내 살붙이와 얼크러지는 살림살이는 살림살이답다 할 만한 자리에 깃들어야 합니다.


- “아름다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름다워! 나는 어째서 우는 거지? 어째서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거지? 그래, 여기서는 모든 것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가뭄 속에서도 모두 살아 있어! 난 몇 년만에 도성에 가 보고는 알았다. 그 귀족놈들의 눈,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든 다치바나든 눈이 모두 죽은 생선처럼 썩어 있었어! 게다가 아카네마루의 인상적인 눈빛마저 죽어 있었다. 대사님, 당신이 왜 이 세상에서 도망쳤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난 죽지 않을 겁니다. 이 산은 내가 살기에 안성맞춤이에요. 난 사는 데까지 살아서, 세상의 인간들을 되살려 보고 싶습니다.” (166∼169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를 여섯 권째 읽습니다. 만화책 《불새》가 사람살이 온갖 기쁨과 눈물과 참과 거짓을 밝히지는 못합니다. 제대로 못 짚는 자리가 있고, 안타까이 지나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거나 모자라나마 살가이 밝히면서 어여삐 보듬는 구석이 있어요. 만화책 《불새》 6권에서는 정치도 종교도 모두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정치도 종교도 온통 쓰레기판이 될 뿐, 아름다운 삶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서로 같습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있으며 이름값이 있을 때에는 정치도 종교도 그저 쓰레기누리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밥을 마련하고 옷을 깁고 집을 다스릴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삶이면서 아름다운 정치나 종교가 꽃피울 테지요.

 

 바르게 길을 걸을 때에 정치가 태어납니다. 살가이 아끼면서 믿을 때에 종교가 태어납니다. 바르게 길을 걷는 사람은 살림을 바르게 꾸립니다. 살가이 아끼면서 믿는 사람은 살림을 착하게 돌봅니다.

 이웃하고 밥을 나누는 어머니가 정치를 잘 하는 어른입니다. 이웃하고 두레를 하는 아버지가 종교를 잘 펼치는 어른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삶을 바라보며 물려받습니다. 슬픈 아이들은 슬픈 어른들 쓰레기판 정치와 종교를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즐거운 아이들은 즐거운 어른들 아름다운 삶을 차근차근 물려받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곧 두 아이 아버지인 나부터, 슬픈 쓰레기 아닌 즐거운 삶을 누리면서 우리 아이들이 예쁘게 물려받는 길을 걸어가야지요.

 

 설을 앞뒤로 시골마을로 정치꾼들 몇몇이 드나들었습니다. 시골마을 어르신들한테 얼굴을 비추려고 ‘국회의원 예비 후보자’가 커다란 자가용을 비서가 몰도록 맡기며 양복을 빼입고 찾아와서 허리를 굽힙니다. 이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참말 ‘정치 일꾼’답게 두 다리로 걸어서 시골마을과 시골마을 사이를 온몸으로 느끼기라도 한다면 이들한테 한 표라도 줄까 싶지만, 자가용을 붕붕 몰아 더 많은 마을 더 많은 어르신들한테 눈도장 찍으려고만 한다면, 아예 쳐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 후보자나 정치 예비자나 정치 경력자 모두 쓰레기 한통속일 뿐이니까요. (4345.1.26.나무.ㅎㄲㅅㄱ)


― 불새 6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3.2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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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2-01-2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는 재활용되기라도 하죠. 흑흑.

숲노래 2012-01-26 20:12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또는... 흙에 묻어 거름으로 삼을 수 있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