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 평가’에 나 혼자 괜히 골을 부리며

 


 지난 2005년부터 내 마음에 오래도록 감도는 시집이 있다. 2005년에 이 시집 느낌글을 하나 쓰기는 했으나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이 느낌글을 썩 제대로 썼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2012년 설을 맞이해 음성까지만 다녀왔다. 음성을 거쳐 일산까지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고흥을 떠나는 새벽까지 옆지기 몸이 어떠한가를 살피느라 음성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막상 미리 끊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못 간다 하더라도 표는 미리 끊어야 하지 않았으랴 싶다. 왜냐하면, ‘간다 10% 못 간다 90%’인 채 광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표 하나는 끊었으니까.

 

 살림돈 후덜거리기에 음성에 간다 하면 음성에서 서울로 갈 기차표 끊을 돈을 걱정할 만하지만, 그래 봤자 10만 원 안팎일 텐데, 정 못 간다면 집에서 취소하면 되니까 그리 근심할 일이 아니었구나 싶은데, 늘 이렇게 때가 지나고서야 뒤늦게 땅을 친다. 아마, 표를 미리 끊었다면 우리 네 식구 음성을 거쳐 일산 옆지기 어버이까지 뵙고 돌아왔겠지.

 

 후줄근하고 초라한 살림집이라 하더라도 어여쁘며 좋은 보금자리이다. 못난 어버이는 없다. 나와 옆지기한테 우리 어버이가 못난 어버이가 아니듯,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가 못난 어버이가 아니다. 서로 꾸밈없이 어여쁜 사람들이다. 조그맣고 조그마한 이 시골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다리 뻗고 즐거이 주무시고 돌아가셔요, 하고 인사할 만하다. 한 지붕에 한 이불 덮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지, 꼭 호텔 방 같은 데에서 묵어야 보람이거나 즐거움이 아니다.

 

 아주 찌뿌둥한 몸으로 새벽에 일어난다. 오래도록 마음에 담은 시집 하나를 헤아리다가, 이 시집에 하나 달린 ‘서평’을 읽다가, 이 시를 내놓은 분 삶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괜히 골이 난다. 어느 분이 별 다섯 만점에 별 둘을 붙이면서 ‘노동시’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는다고 적은 짧은 ‘서평’을 읽다가, 울컥 하고 무언가 치민다. 노동시란 뭐지? 사랑시란 뭐지? 문학이란 뭐지? 시란 뭐지? 글이란 뭐지?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시를 읽으며 생각한다. 이 시골마을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 읽으라고 시를 쓰는 도시사람은 없다. 아무도 없다. 시골마을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예쁘게 나누려고 시를 쓰는 문학쟁이란 없다. 아무도 없다. 연필 쥐기보다 호미 쥐기를 좋아한 박경리 님이라지만, 막상 박경리 님이 쓴 시조차 시골자락 흙을 밟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읽도록 쓴 시이지는 않다.

 

 노동시라면 누가 읽으라는 시일까. 노동자라는 사람이 읽으라는 시인가. 그러면, 노동자라는 사람은 어떤 시를 읽고 어떤 ‘노동자 삶’을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즐기다가는, ‘노동자 삶을 꾸리며 낳은 아이들’한테 이 ‘노동자 일과 삶’을 물려줄 만할까.

 

 새벽바람에 찌뿌둥한 바람으로 골을 부리며 글을 쓴다. 글을 다 쓰니 기운이 폭 빠진다. 울컥 하고 치미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일은 매우 부질없다. 그런데, 찌뿌둥할 뿐 아니라 눈이 절로 감기는 마당에 울컥 하고 치밀다 보니, 없는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책상맡에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쓴다. 책상맡에 걸상을 놓고 앉아 글을 쓸 수 있는데, 옆지기하고 한살림 꾸리던 때부터는 낮은 책상 앞에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쓴다. 일부러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는데, 무릎이 시릴 때까지만 책상맡에서 무릎 꿇고 글을 쓰니 나한테 아주 좋구나 싶다.

 

 내가 즐겨읽던 시집 하나를 누군가 애틋하게 사랑하는 손길로 쓰다듬은 글을 붙여 주었다면, 나는 어떤 넋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때에도 이 시집에 느낌글 하나 쓸 만했을까. 다른 이가 고운 사랑으로 느낌글 하나 썼다면, 나는 애써 내 사랑을 담는 느낌글을 쓰려 했을까.

 

 나는 새해 설날부터 아이한테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마음이나 다짐과 달리 잔소리를 하고야 만다. 잔소리를 하고 난 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또 속을 긁는다. 이 바보스러운 아버지는 얼마나 바보스러운 티를 풀풀 내며 철부지로 살아야 하느냐고 스스로 속을 긁는다. 나는 좀 사랑어린 손길로 우리 집식구를 보듬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살아갈 수 없을까. 자꾸자꾸 이렇게 뉘우치기만 하지 말고, 사랑어린 삶을 누려야 하지 않나.

 

 슬프구나 싶은 서평 때문에 괜히 골을 냈다. 괜히 골을 내면서, 나는, 나부터, 나야말로 골을 부리지 않는 삶을 일구며, 사랑을 돌보는 삶을 누리자고 또 다짐한다.

 

 누군가 나한테 거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달갑잖은 거울은 그야말로 달갑잖다. 아름다운 거울이 좋다. 눈물 흘리는 거울이 좋고, 웃음꽃 흐드러진 거울이 좋다. 새벽에 코피 쏟은 아이 곁으로 돌아가서 더 드러누워야겠다. 아이 손을 살며시 잡고 아이 이불을 여미고 아이 머리칼을 쓸어야겠다. (4345.1.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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