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벗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46]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 《Grizzly》(平凡社,1985)
앓아눕다가 자리를 박차고 겨우 일어난 지 이레쯤 되었나 싶습니다. 좋은 손님이 서울부터 전남 고흥 우리 사진책도서관까지 먼 마실을 하며 찾아오셨기에 처음으로 면내 가게에 술을 시켜 봅니다. 첫째 아이랑 나랑 둘이서 도서관에서 어울려 노는 동안, 옆지기는 집에서 둘째를 살살 달래며 재운 다음 현미가루케익을 굽고 꼴띠(꼴뚜기)지짐을 하며 매생이국을 마련합니다. 몸이 아직 시원찮은 나머지, 밥하기를 옆지기가 맡아 해 줍니다. 곱게 차린 밥상에 술 한 병 올려 좋은 손님이랑 나눕니다.
한 달 조금 못 되게 마시지 않던 보리술을 모처럼 여러 병 마십니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신나게 뛰놀다가 모두 새근새근 잠듭니다. 첫째도 둘째도 마음껏 뛰고 기며 놀다가는 한달음에 곯아떨어집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아주 조용합니다.
날은 따스해 깊은 밤이 되어도 쌀쌀하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마당에 내려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카만 밤빛을 느낍니다. 씻는방에 그득하게 쌓인 빨랫감을 바라보며, ‘뭐 이듬날 아침에 하면 되지. 정 많으면 새벽에 보일러 돌아가며 뜨신 물 나올 때에 조금 나누어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합니다.
방으로 돌아옵니다. 셈틀 앞에 앉습니다. 조용하며 느긋합니다. 자, 이 좋은 느낌을 담아 글 한 줄 써 볼까. 그런데 막상 마음을 가다듬어 글 한 줄 쓰자니 도무지 어디에서인가 꽝꽝 막힙니다. 무엇이 막히지? 왜 막히지? 아, 한동안 마시지 않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이 막히나? 고작 보리술 몇 병으로 이렇게 생각이 멈추나?
한 시간 이십 분쯤 용을 쓰다가 그대로 드러눕습니다. 글쓰기는 용쓰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삶쓰기입니다. 삶을 스스럼없이 북돋우며 사랑하고 아끼는 넋이 샘솟지 않는다면 아무런 글 한 줄 쓸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사랑쓰기입니다. 내 삶을 온마음 바치는 사랑으로 꿈꾸어 가꾸지 못한다면 어떠한 글 하나 낳지 못합니다.
어느새 아이들 곁에서 새근새근 자다가 새벽 네 시에 깹니다. 둘째가 쉬를 누며 잠을 깨 으앙으앙 자지러지게 울거든요. 아이 어머니가 보드라이 달래고 어르며 둘째를 다시 재우고는 다시 모두들 조용히 잠자리를 누립니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자리에 앉습니다. 지난 2010년 가을,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대우서점〉에서 장만하고는 오래오래 책상맡에 두며 틈틈이 들추고 바라본 사진책 《Grizzly》(平凡社,1985)를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을 펼치면 딴짓 하던 다섯 살 첫째 아이가 아버지 곁으로 뽀르르 달려와 “나도! 나도!” 하면서 함께 책장을 넘기며 보겠다고 방방 뜁니다. 다른 사진책을 펼칠 때에는 같이 보자 해도 보지 않더니, 이 사진책 《Grizzly》에는 왜 그리도 달려드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보고 손을 펴라 합니다. 손가락을 만집니다. “자, 손 씻고 보자. 손을 씻지 않고 이 책장을 넘기면 네 손그림이 종이에 묻어.”
그러께 부산에서 《Grizzly》를 장만하면서, 처음에는 이 사진책 찍은 사람 이름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겉종이를 채운 사진만 바라보며 살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곰 찍은 좀 흔한 사진인가?’ 하고 생각하며 지나쳤습니다.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 책잔치 때에 여러 날 머물며 책을 다섯 상자 부피로 장만했는데, 그동안 이 사진책은 흘끗흘끗 지나치며 바라보았을 뿐, 막상 집어들어 책장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보아 하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 사진책을 눈여겨보지 않아요. 잘 보이는 자리에 펼쳐 놓았으나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수동 책잔치가 끝날 무렵, 나와 옆지기가 책을 실컷 장만하고서 이제 더는 책을 고르지 말자고, 책값으로 살림돈이 아주 바닥나겠구나 걱정스러울 무렵, 헌책방 일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헌책방골목 사진을 찍을 무렵, ‘그래, 오늘로 책방마실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 이 책들을 구경하겠니. 사지 않더라도 구경은 하자.’ 하는 마음으로 ‘그냥 곰 찍은 좀 흔한 사진책’으로 여기던 《Grizzly》를 집었습니다.
책 안쪽에는 사인펜으로 ‘엉성하게 휘갈긴’ 듯한 손글씨가 큼직하게 있습니다. 사진쟁이 이름이 넉 자 적힙니다. 한자로 ‘星野道夫 1986.4.4.’를 읽으며 그저 시큰둥합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 글씨도 영 못 쓰는군.’ 그런데 막상 첫 사진을 펼치니 입이 쩍 벌어집니다. ‘어, 뭐야, 겉종이에 넣은 사진이랑 책 짜임새는 영 어설프면서 속에 깃든 사진은 뭐지? 흔하게 만든 흔하게 찍은 동물 사진이 아니었어?’
사진 몇 장 넘기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칩니다. 책날개를 펼칩니다. 사진쟁이 이름을 다시 읽습니다. ‘星野道夫를 어떻게 읽더라. 옳지. 옆에 영어로도 적는구나. Michio Hoshino. 미치오 호시노? 미치오 호시노라. 응, 호시노 미치오?’
1952년 일본 치바에서 태어난 호시노 미치오 님은 1985년 11월 11일에 드디어 당신 첫 사진책 《Grizzly》를 내놓으면서 당신 사진길을 널리 알립니다. 그러니까,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만난 《Grizzly》는 바로 그 《Grizzly》입니다. 처음 내놓은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책이면서, 누군가한테 당신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서 드린 사진책이 부산 보수동 헌책방 한 곳에 널리 잘 보이는 자리에 펼쳐진 채 오래오래 있었구나. 그렇구나.
2010년 9월 11일 저녁, 부산 보수동 여관방에서 잠들기 앞서 사진책 겉에 묻은 ‘세월 때’를 문질러 닦습니다. 옆지기랑 아이하고 사진 한 장 한 장 살몃살몃 넘기며 읽습니다. 다른 책들은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시골집으로 부치지만, 이 사진책은 아이 옷가지와 천기저귀로 꽉 찬 무거운 가방에 함께 넣어 등으로 짊어지며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이태 동안 책상맡에 곱디곱게 모시며 틈날 때마다 들춥니다.
슬슬 동틀 무렵입니다. 동틀 무렵 시골마을 바깥은 참으로 깜깜합니다. 나는 이 깜깜한 새벽빛이 좋습니다. 깜깜한 새벽하늘 가만히 바라보며 누우면, 이내 차츰차츰 부옇게 밝습니다. 파래지고 발개지고 노래지면서 하얗게 바뀌다가는 다시금 파란 빛깔이 온 하늘에 가득 찹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여쁜 빛깔이 무지개처럼 춤을 추는 새벽이에요.
호시노 미치오 님은 춥디추운 땅에서 북극곰처럼 눈밭과 풀밭을 뒹굴며 사진을 찍었겠지요. 수없이 사진을 찍으며 수없이 많은 밤과 낮과 새벽과 아침을 북극에서 맞이했겠지요.
불빛이 아닌 햇빛을 보았겠지요. 동물원 우리가 아닌 드넓은 들판을 보았겠지요. 정수기 물이나 수도꼭지 물이 아닌 얼음장 곁을 흐르는 차디찬 물에서 헤엄치는 연어를 잡는 곰들이 뛰노는 물을 보았겠지요.
아름다운 벗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꿈으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찾아온 사진책 《Grizzly》는 참으로 반갑습니다. 빠듯한 살림이라기보다 고단한 살림으로 사진책도서관을 용케 꾸리는데, 내 좋은 도서관 책꽂이에 《Grizzly》를 얌전히 꽂고는 언제라도 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옆지기랑 아이들이랑 마음껏 펼칠 수 있어 더없이 기쁩니다. 앞으로 서울이나 인천에서, 부산이나 대구에서, 파주나 춘천에서, 양양이나 함양에서 이곳 고흥땅 어여쁜 우리 도서관으로 사진책 구경하러 마실오는 이라면, 누구나 이 사진책 하나 흐뭇하게 손으로 살몃살몃 어루만지며 눈물과 웃음을 쏟을 수 있겠지요. (4345.1.15.해.ㅎㄲㅅㄱ)
이런 말 하기 뭣 하지만... 호시노 미치오 님 첫 사진책(데뷔작) 구경 즐거이 하신 분들은
추천 꾹 눌러 주셔요~ 이 세상에 거저가 어디 있습니까~ ㅋㅋㅋㅋ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