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린이들 - 이기웅 사진집
이기웅 / 열화당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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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이와 이웃 아이 바라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40] 이기웅, 《세상의 어린이들》(열화당,2001)

 


 지난 2001년 1월 1일 첫선을 보인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열화당,2001)을 2001년에 들여다볼 때를 곰곰이 떠올리면서 2012년 올해에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내 모습을 비추어 이 사진책을 다시 펼칩니다. 우리 시골마을 사진책도서관 책꽂이에서 이 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 나는 이 책을 아직 혼인하지 않고 나한테 아이가 없을 때에 처음 만났지.’ 하고 되새깁니다. 예전 내 삶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의 어린이들》이랑 오늘 내 삶으로 헤아릴 《세상의 어린이들》은 얼마나 같거나 얼마나 다를까.

 

 아이들과 살아간다는 나날을 헤아리거나 겪지 못하던 때에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하고, 아이들과 스물네 시간 함께 살아가며 늘 들여다보고 노상 치닥거리하는 나날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은 참 다르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오늘 두 아이랑 복닥인다 하더라도 ‘아이가 없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는 사람’하고 견주어 어린이 사진을 더 잘 읽는다거나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더 잘 찍을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사랑으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사진·글·그림·이야기 모두 달라지니까요.

 

 열한 해 앞서 읽은 책을 열한 해 만에 다시 손에 쥔다면, 똑같은 느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열한 해 동안 똑같은 느낌이 고스란히 이어질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읽든 그림을 읽든 시를 읽든 만화를 읽든, 열한 해라는 나날에 걸쳐 새롭게 일군 내 땀방울과 꾸덕살 이야기를 발판으로 더 깊게 읽거나 한결 넓게 읽을 수 있어요.

 

 열화당 대표 이기웅 님이 일군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을 새삼스레 다시 만지작거리며 홀로 생각합니다. ‘열한 해 앞서 이 사진책을 장만했으니 이렇게 오랜 나날에 걸쳐 책과 사진을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구나. 그저 책방에 선 채로 읽었다면, 아니면 도서관에 이 책을 넣어 달라 말하며 빌려서 읽었다면, 누군가 장만해서 이녁 집 책꽂이에 꽂은 책을 빌려서 읽었다면, 아마 그 한 번 읽은 느낌으로만 이 책을 헤아리지 않겠니. 애써 장만해서 오래도록 건사하는 책 하나가 내 집에 있으면,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곱씹고 되씹으면서 내 넋과 사랑과 꿈과 빛을 한결 따사로이 북돋울 수 있어.’ 사진책 하나 장만하는 일은 기쁨으로 그치지 않아요. 내 눈길을 날마다 새롭게 일구도록 도와요. 언제나 곁에 있는 책을 틈틈이 들추면서 열 번 백 번 천 번 되읽으며 새롭게 생각하거나 돌아보는 빛씨앗을 베풀어요.

 

 이기웅 님은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 끝자락에, “새천년의 첫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십이월 어느 날, 강운구 형의 지프를 타고 몇 날 동안의 새벽녘에, 햇볕 찬란한 한낮에, 그리고 저녁 어스름에 바흐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이 나라 남도의 들과 마을들을 달려 지나고 있었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나는, 우리 국토는 이렇듯 참담하게 망가져 가고 있으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처럼 일그러져 가고 있는가를 화내고 있었다. 나라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로공사로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있는 산천들, 무책임한 건축공사로 속속 들어서고 있는 변태적인 인공구조물들, 치졸의 극에 달한 글자꼴의 간판과 디자인(423쪽).” 하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아, 그래요. 2001년만 하더라도 한국땅 남녘자락이 얼마나 망가지던지요. 2012년이라면 훨씬 더 망가졌겠지요. 앞으로 더 망가질 테며, 2022년쯤 되면 사랑스럽거나 아름답다 싶은 시골마을이 깡그리 무너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기웅 님은 “무자비한 도로공사”를 “지프를 타고 달리며” 느낍니다. 두 다리로 남녘자락을 천천히 거닐며 느끼지는 않아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들은 이 고흥자락이 참 어여쁘며 좋습니다. 고속도로 없지, 기차길 안 들어오지,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지,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재벌회사도 따로 없지, 고흥군에는 대학교 없지, 커다란 회사도 없지, 공장도 보이지 않지, 골프장 없지, 군수가 앞장서서 친환경농업을 하겠다고 외치지 ……. 고흥에서 다른 마을로 마실을 가자면 퍽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에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이 외통수요 멀디멀리 돌아야 하는 만큼, 고흥에서 밖으로 나갈 때에도 외통수이며 멀디멀리 돌아야 하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 멀고 돌아야 하는 길이 즐겁습니다. 지난해 가을녘,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을 거쳐 남원 지나 전주로 가는데, 시외버스 일꾼이 부러 고속도로나 고속국도 아닌 시골국도를 달리더군요. 이 때문에 시외버스는 다른 때보다 좀 더디 달릴밖에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달려서 참 좋았어요. 오가는 자가용 아주 드문 시골국도는 우람하게 자란 나무숲 사이로 달리는 길이면서, 가을자락 깊이 물든 남녘땅 어여쁜 빛깔을 듬뿍 베풀었어요. 시외버스로 세 시간을 달리면서 모처럼 차멀미를 안 할 수 있었어요.

 

 고흥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옮기려고 혼자서, 때로는 아이랑 둘이서, 때로는 네 식구 다 함께 찾아와서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며 움직이기도 했지만, 두 다리로 여러 시간 걸어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천천히 걸어 돌아다니면서 ‘고흥이라는 데로 들어올 바깥 자동차’가 몹시 드물 뿐더러, 마을사람 스스로 자동차 타고 움직일 일도 많지 않다고 느꼈어요. 읍내조차 그닥 어수선하지 않아요. 참 조용해요. 그렇다고 개발 손길이 아예 없지 않으나, 개발을 한대서 돈을 뽑아낼 무언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차분하면서 예뻐요.

 

 구례라든지 곡성이라든지 함양이라든지 양양이라든지 아마 다들 비슷하리라 느껴요.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든 한갓져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하고 가깝지 않다면 호젓하면서 예뻐요. 자동차 아닌 자전거로 움직이면, 시골버스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거닐면, 이 예쁜 온누리를 온통 내 마음으로 받아들일 만해요.

 

 어쩌면, 열화당 대표 이기웅 님이 새천년 첫 자락에 지프 아닌 두 다리로 천천히 남녘자락 시골길을 거닐어 보셨으면 또다른 이야기와 사랑과 느낌을 맞아들이지 않았을까 하고. 그러나, 이기웅 님은 지프를 타고 움직이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지프를 타고 움직이며 더 깊으며 그윽한 멋을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기웅 님은 “이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은 차라리 들꽃이었다. 내 카메라의 렌즈는 그 아름다운 꽃송이를 향해 달려간다. 무념무상으로(423쪽).” 하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끔찍한 막개발과 막삽날을 당신 스스로 느끼지 않았으면 온누리 아이들 들꽃송이 웃음빛을 사진으로 담을 생각을 못 했을 수 있어요. 이러한 생각을 했어도 아주 느즈막하게 했을 수 있고, 굳이 사진책을 내놓자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느껴요. 이기웅 님이 천천히 두 다리로 거닐면서 남녘자락 시골마을 사람들 삶을 받아들였으면, 이러한 결대로 또다른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사진으로 담는 길을 열 수 있었으리라고.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이 나온 지 열한 해가 되었어요. 이제 두 번째 《세상의 어린이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라밖에서 만날 아이들도 예쁘고, 나라안에서 만날 아이들 또한 예뻐요. 멀리 있는 이름 모르는 아이들도 예쁠 테지만, 우리 집 내 아이들도 예쁘고 이웃집 아이들도 예뻐요.

 

 애써 비행기 타고 러시아나 인도로 나들이 가지 않더라도 한국땅 곳곳에서 눈빛 맑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요. 먼저 나부터, 곧 우리 어른들부터 눈빛 맑은 어른으로 살아가면 눈빛 맑은 아이들을 느끼면서 서로 신나게 놀고 예쁘게 어우러질 수 있어요. 이렇게 서로 곱디곱게 춤을 추며 노래하면서 가끔 한두 장 사진을 찍으면, 흐드러지는 춤꽃 노래꽃 이야기꽃 사진들이 피어나리라 믿어요.

 

 좋다고 느끼는 사진은 좋다고 여길 내 삶을 즐거이 일굴 때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찍더라도 태어나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은 아름답다고 여길 내 삶을 아름다이 지을 때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담더라도 태어나요.

 

 내 아이를 바라보며 온누리 아이들을 읽을 수 있어요. 온누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 아이를 느낄 수 있어요. 내 아이들을 찍어도 온누리 아이들 찍는 일하고 같아요. 온누리 아이들 찍는 일은 내 아이들 찍는 일하고 같아요. (4345.1.9.달.ㅎㄲㅅㄱ)


― 세상의 어린이들 (이기웅 사진,열화당 펴냄,2001.1.1./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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