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손에 쥐는 시집

 


 동시 백 꼭지를 쓰고 난 다음 기운이 많이 빠져 한동안 아무 시를 쓰지 못한다. 내가 쓴 동시를 책으로 내줄 만한지 아무 일 없던 듯 지나갈는지 알 길이란 없다. 내 온몸과 온마음을 후비고 지나가는 바람이 고요해지면, 나는 다시 내 삶과 우리 살붙이들 이야기를 동시로 적바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동시꾸러미를 출판사에 보내고 난 뒤, 문득 어떤 빛이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예전에 읽던 낡은 시집을 몇 권 도서관에서 가져온다. 사람들이 한동안 여러모로 떠들다가 이제는 그닥 말이 없는 김관식 시집을 새로 읽는다. 예전에도 얼핏 느끼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기도 할 테지만, 한학을 했던 김관식 님으로서는 참 앳된 나이에 쓴 시마다 갖은 한문을 끼워넣을밖에 없구나 싶으면서, 스스로 이렇게 아프게 시를 써도 되나 싶기도 하다. 스스로 수렁과 구렁에 빠져들며 쓰는 아픈 시에는 한문이 참 많다. 스스로 홀가분하게 열어젖힌 시에는 토박이말이 춤을 춘다.

 

 김관식 님 시집을 읽다가 다른 사람 시집을 읽으면, 시를 쓰는 결과 무늬와 삶과 너비와 꿈과 사랑이 참말 한참 다르고 멀어도 영 다르고 멀구나 싶다. 김관식 님이 당신 스스로 ‘대한민국 김관식’이라 내세울 만하다. 아니, 내세울 수밖에 없지 않나.

 

 아이 어머니는 김관식 시집을 들지 않는다. 한자를 읽지 못하니까. 한글로 된 시집 하나를 들어 읽는다. 몇 꼭지 읽는다. 옆에 있는 다른 시집을 들어 읽는다. 한 꼭지만 읽더니 재미가 없다며 내려놓는다. 아이 어머니는 누가 누구인지를 따로 모르며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마땅한 노릇이다. 이름난 사람이 쓴 시라서 더 읽을 만할 수 없다. 이름 안 난 사람이 쓴 시라서 읽을 값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처음 시를 읽던 중학교 3학년 무렵, 이때에는 시를 쓴 사람 이름을 헤아렸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되고 나서, 우리 형한테 조금 느낌을 물려받아 시를 찾아 읽을 때에는 그저 시를 읽어야지 이름을 읽을 까닭이 없는 줄 배운다. 이름을 떼고, 계급장을 떼고, 사진을 떼고, 나이를 떼고, 껍데기를 떼고, 무엇이든 붙었다면 몽땅 떼고 시집을 쥐어 읽으면 가슴속에 환하게 꽃이 핀다.

 

 잘난 시라든지 못난 시라든지 나눌 수 없다. 아름다운 삶과 따분한 삶이라고는 나눌 수 있을까. 알찬 삶과 겉치레 삶이라고 가를 수 있을까. 좋은 시와 나쁜 시라고 가를 수는 없겠지. 좋은 꿈 실어 나르는 시하고 좋은 꿈이 떠오르지 않는 시는 가를 수 있으려나.

 

 나는 마흔이라는 나이가 가까우면서 비로소 시집을 시집답게 살피며 읽는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누린다. (4345.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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