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시골신문
시골신문을 얻으러 면으로 자전거를 몰고 나간다. 북녘을 다스린다던 사람이 엊그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신문에 글 몇 가지 실렸겠거니 생각한다. 면사무소에서는 신문을 안 읽고 그날그날 버리기에, 이 신문을 얻으러 간다.
면사무소로 온 모양 그대로 신문싸개조차 끌르지 않은 시골신문 몇 가지를 들춘다. 나한테는 전남일보이든 전남매일이든 똑같이 시골신문이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 이야기를 살필 수 있으니까 시골신문이다. 인천에서 살던 때에는 인천일보이든 경인일보이든 똑같이 동네신문이었다.
되쓰는 종이 담는 곳에 놓인 빳빳한 어제 신문 석 장을 챙긴다. 내가 신문을 챙기니, 면사무소에 볼일 보러 와서 커피를 마시던 마을 아주머니 아저씨가 ‘아직 아무도 안 끌른 오늘 시골신문’을 집으며 “여기 신문이 있지? 어제 김정일이 죽었다던가?” 하면서 비로소 신문을 끌러서 구경하려 한다.
집으로 돌아온다. 저 멀리 멧기슭 마을 어디에선가 불을 놓아 무언가를 태우는 연기가 우리 마을까지 퍼진다. 우리 마을에서 누군가 불을 지피면 이 연기는 또 이웃마을까지 퍼지겠지. 자전거를 달리며 연기를 고스란히 들이마신다.
자전거는 벽에 잘 세운다. 가방을 푼다. 면내 빵집에서 산 막대빵을 내놓는다. 아이는 딸기잼 바르는 일에 재미를 붙인다. 손바닥까지 잼투성이가 된다. 아버지는 곁에서 시골신문을 읽는다. 딱히 읽을 만한 글이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 어깨동무할 아름다운 꿈누리를 바라보는 이야기는 찾아 읽을 수 없다.
슥슥 넘긴 신문은 방구석에 밀어놓는다. 아이 어머니는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 5권째 읽는다. 나도 뒤따라 3권째 읽는다.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 사이에서 《달려라 하니》 1권을 읽는다. 어머니가 둘째를 재우러 옆방으로 들어간다. 첫째도 방에서 눕는 시늉을 하며 인형을 옆에 끼고 논다. 이러다가 어느새 ‘어머니가 보던 만화책’을 집어들어 누워서 펼친다. 조금 앞서 어머니가 누워서 만화책을 읽었는데, 이 모습을 고스란히 따라한다.
참 웃긴 녀석이다. 아이 옆에 놓인 시골신문에 굵은 글씨로 새겨진 “김정일 사망”이라는 글월도 참 웃기다. ‘사망’이 뭔가. 한국 대통령이 죽어도, 미국 대통령이 죽어도,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아르헨티나 우두머리가 죽어도, 이렇게 ‘사망’이라고 글을 박을 생각인가. 차라리 한국말로 “김정일 죽음”이라고 적든가. 아니, “김정일 흙으로 가다”라든가 “김정일 눈을 감다”라든가 “김정일 숨을 거두다”처럼 적을 수 없을까.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에서는 무어라 적바림했을까.
그리 궁금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로서는 우리 시골 고흥에서만 나오는 〈고흥신문〉에 실린 슬픈 이야기에 눈길이 간다. 전남교육청에서 고흥군 고등학교 일곱 군데를 두 군데로 ‘강제 통폐합’하려 든다는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에 눈길이 간다. 그나마 일곱 군데 고등학교인데, 이 학교들을 두 군데로 통폐합하면, 나로도에 사는 아이는 삼십 킬로미터 길을 달려 학교를 다녀야 하고, 거금도나 시도 아이는 배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한다. 아니, 고흥에서 살아가는 절반쯤 되는 아이들은 십∼십오 킬로미터 길을 달려 학교를 오가야 한다. 두 군데 고등학교만 남겨 ‘특성화 교육 지원으로 60∼70억 원을 쓰겠다’고 하는데, 60∼70억 원이라는 돈이면 일곱 학교를 일곱 마을에 그대로 살리면서 어여삐 돌보는 데에 써야 제대로 삶과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배움마당으로 복돋울 수 있지 않겠나.
광주도 전라남도에서는 서울하고 똑같다. 순천과 목포와 여수는 전라남도에서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하고 똑같다. (4344.12.22.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