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 그림책 보물창고 13
모디캐이 저스타인 지음, 천미나 옮김 / 보물창고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스며드는 소리와 녹아드는 가락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13] 모디캐이 저스타인, 《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보물창고,2006)

 


 시골집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언제부터 시골집에서 살았나 싶으나, 오늘 이 시골집에서 살아가면서 어느 때까지 도시에서 살았는지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햇수로 치면 고작 이태 앞서인데, 이태 앞서는 꽤 커다란 도시 한켠 골목동네에서 세 식구 복닥거리며 살았다고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너무 먼 옛일 같고, 참으로 아스라한 옛날 같아요.

 

 혼자 잘 달리고 잘 뛰며 잘 노는 네 살 아이를 바라보며 이 아이가 갓난쟁이였던 지난날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아니, 애써 떠올릴 겨를이 없는 하루입니다. 이 아이가 네 살이면 네 살인 오늘을 바라보며 놀고, 이 아이가 다섯 살을 맞이하면 다섯 살인 앞날 그대로 마주하면서 놀겠지요. 이 아이가 열다섯 살을 맞이한다면 열다섯 그대로 바라보리라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스물다섯 살을 맞이할 때에도 스물다섯인 아이를 마주하겠지요.

 

 아이가 어버이를 바라볼 때에도 이와 같겠지요. 아이는 서른일곱 살 아버지와 서른두 살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이윽고 마흔두 살 아버지와 서른일곱 살 어머니를 바라볼 테고, 머잖아 쉰두 살 아버지와 마흔일곱 살 어머니를 마주하겠지요.


.. 찰리 아이브스는 귀를 활짝 연 채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아마 코네티컷 주 댄버리 마을에 찰스의 탄생을 알리는 아버지의 트럼펫 소리였을 것입니다 ..  (4쪽)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오늘 하루를 누리는 삶입니다. 어제는 돌아보고 모레는 그리지만, 오늘은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돌아보기에 애틋하고 내다보기에 그리우며, 살아가기에 즐겁습니다. 오늘 먹는 밥이 맛나고, 오늘 나누는 이야기가 기쁘며, 오늘 만나는 멧새가 반갑습니다.

 

 아침에 빨래해서 마당 한켠 후박나무 빨래줄에 기저귀며 옷가지며 잔뜩 널고 나면, 어느새 마을 멧새 한두 마리쯤 후박나무 가지나 돌울타리 너머 감나무 가지에 앉아 이쪽을 바라봅니다. 바람이 자는 날에는 하늘 올려다보면서 어쩜 구름 하나 없이 파란가 하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드센 날에는 하늘 올려다보면서 어쩜 구름이 이토록 온갖 모양으로 너울거리는가 생각합니다.

 

 아침햇살 드는 대청마루에서 아이가 춤을 춥니다. 네 살 아이는 춤을 추고 한 살 동생은 누나가 추는 춤을 마냥 바라봅니다. 둘째가 홀로 우뚝 서서 두 다리로 달음박질 뜀박질 할 수 있을 때에는 저희 누나하고 아침햇살 누리면서 춤사위를 펼칠는지 모릅니다. 어제 하루 아이가 춤추는 양을 신나게 사진으로 담았고, 그제 하루 아이가 춤추는 몸짓을 재미나게 사진으로 찍었는데, 오늘은 또 오늘대로 오늘 춤사위를 새롭게 사진으로 옮깁니다.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즐거우니까요. 날마다 재미나고, 날마다 좋으니까요.


.. 헛간에서는 건초 냄새와 말 냄새가 났습니다. 찰리는 아버지가 바이올린 켜는 소리와 함께 청개구리 울음소리도 들었습니다. 교회 종소리, 소방차가 지나가는 소리, 아이스크림 장수의 방울 소리, 그리고 기차의 기적 소리도 들었습니다 ..  (9쪽)


 나는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아버지입니다. 나는 오늘 하루 옆지기랑 두 아이와 살림을 꾸리는 집식구입니다. 아마 1996년에는 다른 자리 다른 사람으로 살았을 테고, 2002년에는 또다른 자리 또다른 사람으로 살았을 테지요. 1985년에는 어느 자리 어느 사람으로 살았을까요. 1977년에는 또 어떠한 자리 어떠한 사람으로 내 둘레 사람들하고 삶을 일구었을까요. 내가 되새기지 못하는 갓난쟁이였을 무렵, 나를 날마다 들여다보고 바라보며 마주하던 어버이와 이웃과 살붙이는 날마다 어떤 이야기 어떤 생각 어떤 꿈이었을까요.

 

 우리 집 두 아이는 무럭무럭 커서 저희끼리 살겠다고 떠날 수 있습니다. 나보다 옆지기가 먼저 흙으로 갈 수 있고, 내가 옆지기보다 먼저 흙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이와 같은 날에는 나는 어느 자리 어떤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지난일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으나, 가볍게 살랑이는 바람을 맞는 들판에 서거나 걸을 때에는 하나둘 그림처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앞날은 좀처럼 그릴 수 없지만, 맑은 물을 마시고 맑은 밥을 먹는 좋은 보금자리에서 웃을 때에는 하나하나 꿈처럼 지을 수 있습니다.

 

 내 어제가 모여 오늘을 이루고, 내 오늘을 살면서 내 앞날을 빚지만, 내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 앞날은 오늘에서 거듭납니다. 좋은 소리와 좋은 이야기와 좋은 노래로 보낸 하루는 내 가슴속 한켠에서 좋은 씨앗으로 곱게 잠듭니다. 좋은 햇살과 좋은 밥과 좋은 꿈으로 보낼 오늘은 내 마음속 한자리에서 좋은 싹을 틔워 힘껏 줄기를 뻗습니다. 스스로 살면서 스스로 짓는 나날입니다.


.. 어느 무더운 여름, 찰리는 자신이 던진 야구공이 야구 방망이에 ‘딱’ 하고 맞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허겁지겁 야구공을 쫓아 달려갈 때,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  (20쪽)


 모디캐이 저스타인 님이 빚은 그림책 《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보물창고,2006)를 읽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를 생각해 보는데, 찰리가 태어날 적부터 숨을 거두는 날까지 들은 소리는 ‘온몸과 온마음을 어지러이 채우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림책 그림은 너무 어지럽거든요. 찰리라고 하는 사람 가슴속에서 곱게 피어나며 예쁘게 어우러지던 가락이란 이렇게 어지러운 그림 아니면 빚을 수 없을까 궁금합니다. 찰리라고 하는 사람 마음밭에서 즐거이 뿌리내리며 기운차게 뻗은 줄기와 가지와 잎사귀는 이토록 어수선한 그림 아니면 그릴 수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소리가 어떠한 삶으로 스며들어 어떠한 가락으로 어우러졌을까요. 어떠한 꿈이 어떠한 결로 녹아들며 어떠한 노래로 빛났을까요.

 

 찰리는 틀림없이 아버지 트럼펫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트럼펫 소리는 어머니 핏방울 흐르는 소리보다 펄떡이거나 따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트럼펫 소리는 바로 어머니 핏방울 흐르는 소리를 듣는 마음귀로 울릴 수 있어요.

 

 아버지가 숨을 거둔 이야기를 건네는 전화기 가느다란 줄에서 울리는 소리는 거룩한 고요함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죽음 이야기는 전화기 가느다란 줄에서 슬픈 목소리로 울리기 앞서, 아버지가 고요히 눈을 감는 그때 그곳에서 찰리한테 살그마니 울렸습니다. 찰리는 전화를 받기 앞서 소리를 들었고, 찰리 둘레에는 전화기 가느다란 줄에 이런저런 목소리가 울리기 앞서 온 방을 채우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 찰리는 출퇴근하는 기차 안에서도 곡을 썼습니다. 기차 바퀴에서는 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들렸습니다. 찰리는 두 관악대가 동시에 서로 다른 곡을 연주했던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가득 채운 소리들과 흥겨움을 작품 속에 표현했습니다 ..  (31쪽)


 그림책 하나가 모든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림책 하나로 모든 꿈을 빚지 않습니다. 그림책 하나에 모든 사랑을 담지 않아요.

 

 다만, 그림책 하나로 웃음과 눈물이 얼크러진 이야기꽃 피웁니다.

 

 이야기꽃 노래꽃 꿈꽃 사랑꽃 눈물꽃 똥꽃 밥꽃 바람꽃 하늘꽃 구름꽃 냇물꽃이란 어떤 내음과 소리와 무늬와 빛깔과 결로 우리한테 스며들까 헤아립니다. 아이가 대청마루 쿵쿵 찧으며 춤사위 펼치는 아침나절,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은 어떤 내음과 소리와 무늬와 빛깔과 결을 차근차근 받아들이려나 곱씹습니다.

 

 어느새 둘째가 똥을 누었군요. 어머니는 똥내음을 맡고, 아버지는 똥을 치우며 아기를 씻깁니다.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낑낑 우는 아기를 어머니한테 맡깁니다. 이제 아기는 어머니젖을 물면서 고요히 눈을 감겠지요. (4344.12.20.불.ㅎㄲㅅㄱ)


― 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그림,천미나 옮김,보물창고 펴냄,2006.3.25./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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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20 16:49   좋아요 0 | URL
아기의 똥은 치울만하죠, 상상해도 즐겁구요. ^^
둘째가 똥을 누었다고 쓰신 부분에서 절로 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쁘네요.

숲노래 2011-12-20 17:21   좋아요 0 | URL
날마다 수없이 먹고 누고 하면서
무럭무럭 크는데
이 아이들은 나중에 떠올리지 못하겠지요.

저도 아기일 적에
똥을 얼마나 누었는지 못 떠올리고요 @.@

2011-12-21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1-12-21 03:46   좋아요 0 | URL
저는 2007년부터 `사진책 도서관`을 개인도서관으로 열었어요. 헌책방 마실은 즐기지만, 헌책방을 차린 적은 없어요.

사진책 도서관으로 하지만, 그림책과 만화책과 어린이책과 환경책을 비롯해서 온갖 책을 골고루 갖춘답니다.

kimji 님이 쓰신 책이 있군요! 보내 주시면 고맙게 받지요~~ ^^
깊고 늦은 밤나절 고마운 이야기 즐겁게 읽으며 댓글을 남겨요.
언제나 좋은 하루와 고마운 나날 누리시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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