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끌르기


 지난 오월 끝무렵부터 끈으로 묶인 책을 끌른다. 여섯 달 만에 비로소 햇살을 쬐는 책들이다. 여섯 달이나 이 책들은 책 노릇을 못하면서 다시금 끈 자국이 나야 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책들은 내가 살림자리를 자꾸 옮겨야 하면서 자꾸 생채기만 더한다. 오래 묵은 책은 오래 묵은 대로 종이가 바스라지고 다친다.

 거의 넉 달 가까이 들여 묶은 책이니, 이 책을 끌르는 데에도 품이 퍽 많이 들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책 끌르기에 마음과 품과 겨를을 들이다 보면, 곧 다섯 살로 접어들 첫째 아이랑 이제 두 살이 될 둘째 아이하고 덜 복닥일밖에 없으리라. 책은 책대로 너무 오래 끈에 묶인 채 잔뜩 쌓이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살가운 사랑을 받아먹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당신 하고픈 일과 꿈을 북돋울 수 있어야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또 밤과 새벽 사이, 온통 집식구한테 둘러싸여 보내다 보면, 도무지 내 자리는 어디요 나는 어디에 서는지 알 길이 없곤 한다. 그렇지만, 뻑적지근한 몸을 드러누워 한숨을 쉬고 사르르 눈을 감으며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나는 이렇게 좋은 살붙이하고 어우러지면서 오늘 하루 참 빠듯하게 한 분 한 초 아끼며 숨을 쉬었구나 싶다. 나는 이 아이들하고 옆지기랑 하루를 살아낸 자국을 내 머리카락과 발바닥 구석구석 아로새긴다. 좋은 삶이다. 고마운 나날이다. 내가 앞으로 이을 수 있는 내 나날 동안 이 하루를 즐기면서, 내가 앞으로 눈을 감고 몸뚱이는 흙한테 내주고 나서는 내 아이들이 낳아 새로 돌볼 아이들이 자라서 새 아이들을 낳을 무렵, 이 새 아이들이 천천히 크며 저희 새 사랑을 마주하며 새 아이를 낳을 때에 조용히 새삶을 이으리라. 오늘부터 백 해쯤 뒤, 또는 일흔 해쯤 뒤, 새숨을 쉴 내가 살아갈 만한 좋은 터전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살붙이들하고 이 보금자리를 곱게 일구자고 다짐한다. (4344.11.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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