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장인 클로드 1 - 술의 참맛
오제 아키라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서로서로 좋아하면 즐겁습니다
 [만화책 즐겨읽기 74] 오제 아키라, 《술의 장인 클로드 (1)》



 시골에서 살아가며 술 한 병 마시기란 참 힘들다. 나는 자가용이 없고 자가용을 몰 생각이 없으니, 시골에서는 술 한 병 마시기가 퍽 고단하다. 두 다리로 걸어서 가장 가깝다 싶은 가게(가장 가까워도 새로 옮긴 시골마을에서는 2.1킬로미터를 가야 한다. 예전 살던 시골마을에서는 가장 가까운 가게가 7.9킬로미터였다)로 가든, 자전거를 몰고 가든 해야 한다. 막상 자전거를 이끌고 면내 가게에 들른다 하더라도 술을 열 병 스무 병 사지 못한다. 이렇게 샀다가는 무거워서 못 들고 오기도 하지만, 애써 나갔다 하더라도 하루 마실 만큼 산다. 산다 하더라도 한 번 마실하며 보리술 두 병.

 면내나 읍내로 마실을 나가서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는 집식구 먹을 여러 가지를 함께 장만하니까 술병 담을 자리가 없다 할 만하다. 짐꾸러미 짊어지고 자전거를 이끌며 돌아오면 땀이 쏟아지니 한 병쯤 우겨넣을 수 있는데, 어찌 되든 자가용 없는 시골사람이 술 한 병 장만하기란 참 까마득한 노릇이다.

 시골에서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술을 고르기 까다롭다. 시골 가게에서 갖추는 보리술은 늘 뻔하니까. 읍내 하나로마트쯤 되지 않고서야 이 술 저 술 골고루 두지 않지만, 읍내 하나로마트는 큰도시 웬만한 마트보다 가짓수가 적다. 그러니까, 언제나 뻔한 술 아니고는 마주하기조차 어렵다.

 술이면 다 같은 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술맛을 한 모금 보면, 갈래마다 맛이 참 다르다고 금세 알아챈다. 날마다 밥을 해서 먹을 때에도 날마다 밥맛이 조금씩 다른 줄 느끼는데, 술맛을 못 느낄까. 더구나, 잔뜩 벌여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이 아니라, 한 모금씩 아끼며 천천히 즐기는 술이라 할 때에는.

 그러나, 나는 밥맛이나 반찬맛을 그닥 깊이 느끼지 못한다. 옆지기는 밥맛이나 반찬맛을 나와 견주어 훨씬 잘 느끼거나 알아챈다. 코가 안 좋으니 혀 또한 맛을 옳게 못 느낀달 수 있다. 옆지기는 옆지기 몸으로 받아들이는 먹을거리가 어떠한가를 나보다 더 깊이 헤아리면서 마음을 기울이니, 나보다 한결 잘 느끼거나 알아채리라 본다.


- “나도 이런 사소한 일로 트집잡는 놈이 아니라구. 흥도 깨지고 말야. 하지만 서비스업은 이런 사소한 일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27쪽)
- “이 가게를 어떤 가게로 만들고 싶은지, 손님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실례지만 이 가게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 같군요.” (139쪽)


 깊은 밤, 잠에서 깬 나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셈틀을 켠다. 첫째 아이가 쉬 마렵다고 징징거릴 때에 깨어서 쉬를 누이고 난 다음, 첫째 아이는 토닥토닥 재웠으나,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글을 쓴다. 하루를 돌아본다. 오늘은 새 보금자리 끝방 벽종이를 바르려고 부산을 떠는데, 부엌 싱크대 놓는 분이 낮밥 무렵 들이닥친다. 전화를 하면 사흘쯤 뒤에 온다 하더니, 아침 열한 시 오십 분쯤 전화했는데 한 시간 만에 찾아온다. 빨래하랴 청소하랴 마당 치우랴, 손수레 바닥에 깔 헌 장판 씻어서 말리랴 끝방 낡은 벽종이 떼랴, 벽종이 떼며 나무창틀에 달라붙어 잘 안 떨어지는 낡은 벽종이조각 긁으랴, 이래저래 바쁜 때에 싱크대 공사 마무리를 한다. 겨우 마무리를 지은 다음 냄새 빠지라고 문을 연다. 부엌 바닥에 쌓은 상자 둘을 끌르고 아래쪽 싱크대에 놓은 물건을 갈무리한다. 이러면서 낮밥거리로 무얼 할까 생각할 틈이 없어, 어제 먹고 남은 미역국에 라면을 끓이기로 한다. 밥이 다 되고 라면이 다 된다. 불기 앞서 먹자고 식구들을 부른다. 큰소리로 여러 차례 부르는데 네 살 딸아이조차 아무 대꾸가 없다. 옆지기랑 아이가 셈틀 앞에 앉아 노래를 듣느라 내가 부엌에서 부르는 소리를 못 듣는가 보다.

 아버지는 삐친다. 아니, 힘이 든다. 생각해 보니, 옆지기랑 아이는 주섬주섬 뭔가를 먹어 배가 안 고픈지 모른다. 부엌 살림 마저 갈무리한다. 끝방 벽종이 긁기를 조금 한다. 천장 길이를 잰다. 이 길이에 맞게 벽종이를 열넉 장 자른다. 풀을 갤까 하며 시계를 보니 네 시 이십 분. 오늘은 우체국에 들러야 하는데 자칫 늦을까 걱정스럽다. 하던 일은 여기에서 멈추고, 얼른 자전거를 끌고 나가려 한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부엌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은 그동안 차갑게 식은 불어터진 라면을 본다.


- “할머니, 죄송해요. 저는 일본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냥 할머니처럼 꿈속의 일본에만 만족해야 했어요. 지금 일본은 가는 곳마다 온통 시멘트뿐이에요.” (47쪽)
- “좋은 술 만드는 사람, 좋은 술 마신다! 주임님, 좋은 술 만드는 사람! 저녁 반주, 좋은 술 마신다!” (119쪽)



 마음을 다친 때에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마음이 힘들거나 아플 때에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술이 참 아무렇게나 들어가고 만다. 이때에는 몸을 망가뜨리는 술이 되기에 스스로 술을 꺼린다. 어떻게든 마음을 풀어야 한다. 마음을 풀지 않으면 밥조차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면내 볼일 마치고 돌아와서 빨래를 걷고 새 빨래를 하며 아이들을 씻긴다. 씻고 나서 똥을 눈 둘째 아이 밑을 다시 씻기고 빨래를 새로 더 한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깊어지는데 낮잠 안 자며 떼를 많이 쓰던 첫째 아이는 도무지 잘 생각을 안 한다. 나는 더 버틸 수 없다. 몸이 견디지 못한다. 내가 내 몸을 더 아끼려는 뜻이 아니라, 집안일과 집밖일을 아울러 도맡는 아버지가 쓰러지면 이 보금자리가 어떻게 될까 근심스럽다. 그러니까, 몸이 견디지 못할 때에는 그만 드러눕는다. 몸이 아프면 얼마나 힘든데. 몸이 아파 일을 못하면 아이들 빨래와 밥과 살림은 어떻게 하는데.

 한숨을 쉴 수 없다. 하소연을 할 수 없다. 어머니를 생각한다. 아이들한테 어머니가 될 옆지기를 헤아린다. 옆지기가 그릴 옆지기 어머님을 떠올린다.

 내 어머니는 당신 삶을 어떻게 일구었을까. 두 아이 어머니인 옆지기는 하루 삶을 어떻게 보내는가. 두 아이 어머니가 된 옆지기와 여러 아이를 낳아 돌본 장모님은 어떤 나날이었을까. 옆지기 어머님을 낳아 기른 어머님은 또 어떤 삶이었을까. 내 어머니를 낳고 사랑한 어머니는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즐거울 때나 힘겨울 때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내가 홀로 홀짝이는 보리술 한두 잔은, 이제 어머니 곁을 떠나 살아가며 나 또한 어머니처럼 아이를 낳아 보살피는 자리에 서며 내 말과 넋과 삶을 차분히 되새기도록 이끄는 징검돌이다. 속풀이 술이 아니고, 질펀한 놀이가 아니다. 절고 전 술이 아니요, 해롱대는 술이 아니다.


- “클로드, 네가 빛나 보인다. 매일 전표를 보고 돈 계산을 하다 보면 꿈 같은 건 꾸고 있을 여유가 없거든.” “지금 비꼬는 거야, 히로? 내가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다만, 너의 꿈을 이루기 전에 니혼슈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91쪽)
- “왜 술 만드는 걸 배우고 싶으십니까?” “니혼슈가 좋아서입니다.” “그것뿐인가요?”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제 말은 말도 통하지 않고, 일본인도 술 만드는 건 잘 모르거든요. 미국인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맛이나 향은 알 수 있습니다. 찐살, 누룩, 모로미 ……. 쿠라엔 많은 향과 맛이 있고, 그것들이 나에게 많은 것 가르쳐 줍니다. 언어 이상으로.” (114쪽)



 좋은 사람으로서 좋은 사랑을 하고 싶다. 좋은 밥을 먹고 좋은 몸을 다스리고 싶다. 좋은 술을 마시며 좋게 즐기고 싶다. 좋은 꿈을 꾸며 좋은 길을 걷고 싶다. 좋은 책을 읽으며 좋은 슬기를 갈고닦고 싶다. 좋은 삶을 좋은 옆지기하고 일구면서 좋은 아이들 좋은 꽃이 피도록 좋은 힘을 내고 싶다. 좋은 마을 좋은 집에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값싸게 빚는 술이래서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냥 알콜 몇 퍼센트 섞는 술은 달갑지 않고, 화학첨가물이 무엇인지 안 밝히는 소주는 내키지 않다. 그렇다고 한국 보리술이 좋은 보리를 좋은 농사를 지어 얻은 다음 좋게 빚는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한국땅 들판을 보라. 어디에서 보리가 자라는가. 어느 시골마을에 보리밭이 널찍하게 펼쳐지는가. 보리밭 마땅히 없는 이 나라에서 보리술은 왜 이리 많이 팔리는가. 한국땅에서 마시는 보리술은 어느 나라 어떤 흙일꾼 어떤 보리로 빚은 술일까.

 나는 2005년에 중국 연길시 둘레를 다녀오고 나서 중국술을 좋아한다. 옥수수로 빚은 중국술이 참 좋구나 하고 깨닫는다. 중국술에도 알콜을 퍼부을까. 중국술도 알콜을 퍼부어 도수를 맞출까. 모를 노릇이지. 다만, 한국땅에서는 옥수수로든 고구마로든 감자로든 쌀로든 보리로든, 한국땅에서 고이 길러 고이 술로 빚으려고 하는 일이 퍽 드물다. 한국에는 막걸리가 있지만, 화학첨가물 안 넣는 막걸리는 아직 구경하지 못했다. 왜 화학첨가물을 꼭 넣어야 할까. 먼 옛날 막걸리를 빚은 한겨레붙이는 화학첨가물을 넣었을까. 왜 한국사람은 한국술을 이다지도 엉터리로 빚으면서 엉터리 술이요 엉터리 삶이며 엉터리 사랑인 줄 느끼지 못하나. 참사랑을 느끼는 가슴은 어디에 있을까. 참삶을 찾으려는 몸부림은 어디에 있는가.


- “그 한편으론 니혼슈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말이야. 기껏해야 술 취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감동도 없는 술이지. 클로드, 나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술을 만들고 싶어.” (132쪽)
- “네, 노력할게요. 하지만 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간단해요. 술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게 손님을 늘리는 것보다 중요하니까요.” (162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술의 장인 클로드》(대원씨아이,2007) 1권을 읽는다. 오제 아키라 님 다른 만화책에서도 느끼는데, 이분은 ‘술을 알리는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일본술을 알리는 만화’ 또한 그리지 않는다. 오제 아키라 님은 ‘사람이 사랑할 삶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다. 다만, 오제 아키라 님이 ‘사람이 사랑할 삶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징검돌(이야기 주제)이 ‘술’이요, 이 가운데 ‘일본술’일 뿐이다.

 오제 아키라 님이 술을 알린다거나 일본술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만화를 그렸다면 대단히 따분했으리라 느낀다. 홍보나 소개를 꾀하며 그리는 ‘정보와 지식 넘치는’ 만화란 얼마나 재미없는가.

 사람은 누구나 배우기 마련이요, 늙어서 눈을 감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지만, 지식조각이나 정보조각으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오직 사랑으로 배운다. 오로지 사랑을 배운다.

 《술의 장인 클로드》 1권을 마칠 무렵 ‘일본술 도매상 아줌마’ 입을 거쳐 읊은 “술을 많이 사랑해 주세요”란 그저 ‘많이 사랑해 주세요’이다. 내 삶을 사랑하고, 내 옆지기 삶을 사랑하며, 내 아이들 삶을 사랑할 노릇이다. 서로서로 사랑하고, 서로서로 아끼며, 서로서로 좋아할 노릇이다. 서로서로 좋아하면 즐겁다. 즐거울 때에 술 한 잔 홀짝인다. (4344.11.2.물.ㅎㄲㅅㄱ)


― 술의 장인 클로드 1 (오제 아키라 글·그림,임근애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07.10.15./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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