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작은 이야기, 작은 삶, 작은 책
 [책읽기 삶읽기 83]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2003)



 소설을 쓰는 한강 님이 쓴 산문을 모은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2003)을 읽는다. 책 판짜임은 자그마한데 빈자리 많고 글씨를 아주 큼지막하게 박아서 나온, 종이를 참 많이 잡아먹으면서 쪽수를 잔뜩 늘린 책을 읽는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원고지로 치면 몇 장쯤 될까. 300장이나 될까. 300장은 넘을까. ‘작은 이야기’를 억지스레 책 하나로 꾸민 셈 아닌가 싶다. 굳이 책 하나로 따로 묶을 까닭은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내야 했을까 궁금하다. 반드시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내놓아 사람들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여겼을까 아리송하다.

 원고지로 몇 장 안 된다면, 말 그대로 작은 책으로 꾸미면 된다. 쪽수는 더 적고 부피는 더 적으며 책값은 훨씬 눅은 작은 책으로 엮으면 된다. 한 권에 5000원이나 3000원 값을 붙이는 자그마한 책으로 만들면 된다. 뒷주머니에 꼽을 수 있게끔 작게 만들면 된다. ‘작은 이야기’라 해서 책으로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작은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대로 ‘작은 책’으로 일굴 때에 참말 아름다우면서 뜻깊으니까.


.. 우리는 버스의 중간쯤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한국어에 대해 물었고 영어를 중고등학교에서 배운다고 내가 설명하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도 영어는 모국어가 아냐. 보호구역의 미션스쿨에서 배웠지. 내가 아파치말을 쓸 때마다 수녀들이 날 때렸어……. ‘노 아팟치!’ ‘노 아팟치!’ 하면서. 한 수녀는 내 새끼손가락을 세 번 분질렀어.” ..  (10쪽)


 한강 님이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 담은 이야기는 한강 님 삶이라기보다, 한강 님이 미국에서 문학을 새롭게 배울 때에 만난 사람들한테서 ‘얻은 삶 이야기’이다. 스스로 더 깊이 깨닫거나 느끼거나 헤아린 이야기는 아니다. 둘레에서 저마다 다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 다 다른 말과 넋과 꿈을 담아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곰곰이 돌이킨다. 한강 님 스스로 일구는 이야기조차 아닌, 다른 사람 입을 거쳐 나온 이야기로 가득 채우는 책을 ‘한강 산문모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가.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책 하나로서 그닥 아름답지 못하다. 예쁘지 못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만 책이다. 글쓴이 삶도, 출판사 뜻도, 썩 사랑스레 어우러지지 못한 채 태어났다고 느낀다.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9·11 때 파괴된 게 무역센터가 아니라 센트럴파크였다면 뉴욕사람들은 결코 극복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 거대한 초록빛 허파가 아니라면 이 도시는 견뎌낼 만한 공간이 못 돼요.” 캐런만이 쓸 수 있는 편지, 솔직하고 쓸쓸한 문장들 앞에 나는 잠시 막막해졌다 ..  (26쪽)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고 으레 말하는데, 옳게 말하자면, 이 말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는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꽃은 꽃 그대로 예쁘다” 하고 말해야 옳다.

 예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 그대로 예쁘다.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가르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이 결 그대로 예쁘다. 꽃은 꽃이기에 이 모습 그대로 예쁘다.

 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 책이건 예쁘다. 한강 님 산문모음은 이 산문모음대로 예쁘다. 나는 오직 이 까닭 하나 때문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장만해서 읽는다. 글쓴이를 더 좋아한다거나 출판사를 더 아낀다거나 문학을 더 즐긴다거나 하는 까닭이 아니다. 그예 예쁜 책 하나를 새로 만나 기쁘게 살아가고 싶기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장만해서 읽는다.

 전라남도 고흥에서 일산을 거쳐 인천으로 갔다가 다시금 일산으로 갔다가는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금세 읽는다. 책은 인천에서 산다. 일산에서 시외버스 타러 전철을 먼저 타고 서울로 접어들 무렵 후루룩 읽고는 덮는다. 글이 짧다고 금세 읽어치우지는 않지만, 더디 읽을 수는 없는 책이다.


..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읽고 외국어로 쓰는 생활. 밤과 아침이면 긴 일기와 편지를 썼지만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모국어라는 것이 나에게 밥과 공기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천천히 깨달아 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침대에 걸터앉아 어릴 때 부르던 노래들을 불러 보곤 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하고 부르다 보면 그 발음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에 나직이 사무치는 것을 느꼈다 ..  (83쪽)


 다 읽은 책을 무릎에 얹는다. 고개를 든다. 메마른 낯빛 딱딱한 몸짓 어두운 옷빛이 감도는 서울 지하철을 함께 탄 내 몸을 돌아본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물결을 이루는 하나가 된 내 몸을 헤아린다. 시골사람 주제에 서울 지하철을 타고는 책 하나 읽은 내 몸을 곱씹는다.

 요새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내 고무신 차림을 기웃기웃 훔쳐본다. 우리 보금자리 깃든 마을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고무신을 신으니까 내 신차림을 기웃기웃 훔쳐볼 까닭이 없다. 면내나 읍내로만 나가도 초등학생이건 중학생이건 면사무소 일꾼이건 누구건, 아니 고등학교 교사이건 유치원 교사이건 고무신을 안 신는다. 흙을 밟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무신을 안 신는다.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는 고무신을 구경할 수 없다. 이 도시하고는 참 안 어울리는 고무신을 꿰고, 이 도시살이하고는 도무지 안 맞는 책읽기를 한답시고 가방에 책 여러 권 쟁여 바깥볼일을 보는 내 삶을 차근차근 되뇐다.

 그래, 사람들 스스로 흙을 안 밟으니까 고무신을 안 신는다. 아니, 예전에는 다들 짚신을 신었지. 흙을 밟는 사람이니까 짚신을 삼아서 신지. 흙을 안 밟을 뿐 아니라, 흙 있을 자리를 모두 시멘트로 밀고 아스팔트를 까니까 고무신마저 신을 수 없지. 값비싼 구두나 운동신을 신으려 할 테지. 아니, 구두나 운동신이 아니고서는 시멘트길과 아스팔트길을 어찌할 수 없겠지.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구두가 어울리지 고무신이 어울리겠나. 외국출장을 가건 국내여행을 하건 등산신처럼 크고 두툼한 신을 꿰어야 걸맞지 고무신이 걸맞겠나.


.. 흙을 밟고 싶다, 나무들의 뼈대를 보고 마른 낙엽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리며, 나는 얼마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이 공간을 혐오하게 되었다 … 그 삭막한 기다림 속에서 나는 수유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 시내에서 돌아오면 맑은 공기가 코와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다. 마을버스로만 지하철과 연결되었으므로 교통은 불편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내킬 때마다 흙을 밟을 수 있고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그곳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냈다 ..  (134쪽)


 한강 님 산문을 처음 읽으면서, 한창 읽는 동안, 마지막 쪽까지 읽어내어 덮고 난 다음, 한강 님은 어느 동네 어느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몹시 궁금하다. 왜 스스로 수유리를 떠나 흙을 안 밟아야 하는 땅에서 살아가며 푸념을 늘어놓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왜 스스로 가장 좋으며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사랑스러우며 가장 빛나며 가장 거룩하며 가장 즐거울 길을 스스로 안 걸으면서 푸념만 쌓는지 더없이 궁금하다.

 뒤늦게나마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이 고마움인 줄 알았다면, 흙을 밟을 수 있는 데로 옮겨야 마땅하다. 흙을 밟으며 흙을 만져야 한다. 나무를 쓰다듬고 풀을 어루만져야 한다.

 한강 님 산문모음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은 사람 가운데 흙사랑을 하거나 흙삶을 일구려 하는 사람이 얼마쯤 될까 모르겠다. 한강 님이 미국에서 문학을 새롭게 배운 젊디젊은 날 발자취를 책으로 묶은 일도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한강 님이 ‘흙을 밟으며 느낀 사랑과 꿈과 믿음’을 따사로우면서 넉넉하게 글로 여민 이야기를 책으로 묶을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지며 대단할까 하고 꿈을 꾼다. (4344.10.25.불.ㅎㄲㅅㄱ)


―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한강 글,열림원 펴냄,2003.8.1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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