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선생님 1 세미콜론 코믹스
다케토미 겐지 지음, 홍성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선생님은 학교에서 뭘 할 수 있나요
 [만화책 즐겨읽기 65] 다케오미 겐지, 《스즈키 선생님 (1)》


 ‘선생님’ 아닌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은 스스로 ‘선생님’이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은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열면 안 됩니다. ‘선생’도 아닌 ‘선생님’은 남이 나를 높이면서 부르는 말이지, 내가 나를 높이면서 가리킬 수 없는 말입니다. 아이들 앞에 선 사람은 “나는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열어야 올바릅니다.

 곧 ‘선생님’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학교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학교 안팎에서 어느 하나 할 수 없는 이가 선생님입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 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태어나서 밥그릇을 좀 많이 비웠으니까, 나어린 이들이 높임말로 우러르거나 섬겨야 하겠습니까. 나이가 많으면 그저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서로를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사람은 서로를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으로 바라볼 까닭이 없어요.

 사람은 서로를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사람은 서로를 학벌이나 학연이나 지연 따위로 바라보지 않으며, 학벌이나 학연이나 지연 따위로 바라볼 까닭이 없어요.

 서로서로 좋은 넋을 헤아리면서 서로서로 따스한 얼을 북돋웁니다. 내 고운 사랑을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네 기쁜 사랑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내 빛나는 넋을 예쁘게 뿌립니다. 네 빛나는 눈길을 고마이 받아들입니다.

 이리하여, 선생님 자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요, 교사 자리는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자리입니다. 이른바 학교라는 데에서는 교사 몫을 하는 이가 ‘가르치기’만 하면서 ‘달삯’을 챙길 뿐입니다.


- “나도 모르게 내가 알고 있는 게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어요.” “그랬군요. 그럼 예전에 전화로 얘기한 반 회의는?” “네, 안 하려고요. 종례시간에 모두에게 담담하게 이즈미의 얘기를 전하고 돌려보냈어요. 나머지는 혼자서 차분하게 깊이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말이죠. 솔직히 걱정했지만, 나카무라도 신중하게 들어 줬어요. 그렇게 보였어요. 너무 낙관적인 걸까요?” “이것저것 모두 교사가 손 안에 쥐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47쪽)


 교사는 학생 자리에 선 사람한테 ‘교과서 지식을 가르치는’ 몫을 맡겠다면서 교육대학을 네 해 다니고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땁니다. 학원에서도 이와 똑같아요. 운전학원이건 발레학원이건 피아노학원이건 태권도학원이건, ‘지식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이는 먼저 여러 해에 걸쳐 자격증을 따려고 애씁니다. 자격증을 딴 다음에는 달삯이라는 돈을 벌 일자리를 알아봅니다. 작은 사람을 맡아 작은 사람이 살아갈 아름다운 나날에 빛나는 마음밥이 될 넋이나 얼을 보살피는 이야기는 ‘자격증을 따는 동안 따로 배우지 않’아요.

 교사는 공무원입니다. 나라에서 달삯과 수당과 연금을 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건 나라에서는 공무원 노릇을 하는 교사한테 달삯과 수당과 연금을 줍니다.

 교사는 노동자입니다. 노동자인 교사한테는 노동3권이 있을 테니, 노동3권을 외칩니다.

 그러니까, 공무원이자 노동자인 교사입니다. 이밖에 달리 아무것도 아닌 교사입니다. 아이들 앞에 설 때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먼저 태어났으니까 우러름을 받으려는(선생님)’ 사람이면서 ‘넉넉히 돈을 받는(공무원)’ 사람인 한편 ‘권리를 누리는(노동자)’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면서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이나 ‘시사상식’만 들려줍니다.


- “선생님이 잘 해결해 주실 거야.” “정말? 왜 그럴까. 탕수육, 왜 다들 먹지 못할 정도로 싫어하는 걸까.” (75쪽)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선생님도 내키지 않고 교사도 못마땅합니다. 그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그예 어른이면 반갑겠습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이요,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입니다. 어린이 마음이나 푸름이 마음이 되겠다고 섣불리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입니다. 사람이자 어른인 줄 거듭 되뇌며 다시금 아로새겨야 합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이라고 깨닫고 살아낼 때에 비로소 교과서이든 교과서 아닌 책이든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무엇이든, 아이들하고 함께 가르치고 배웁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이라고 느끼며 어깨동무할 때에 바야흐로 어른으로서 내 삶을 어떻게 일구면서 아이들 스스로 어떤 삶을 아이들 스스로 일굴 때에 서로 아름다울까 하고 알아차립니다.

 사랑을 해야지 사랑 지식을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짝꿍을 사랑하고 살붙이를 사랑하며 동무를 사랑할 노릇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지 이웃을 불쌍히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동무를 좋아해야지 동무를 부러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짝꿍을 사랑해야지 짝꿍 살결을 주물럭거릴 까닭이 없어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무엇이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나누며, 무엇을 남기거나 돌보아야 하는가를 먼저 살피고 깨달아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이어주는 몫을 맡을 때에 ‘교사’라는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어른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넋을 가다듬어 어떤 말을 펼치며 어떤 삶을 가꾸는가를 올바르며 착하고 참다이 삭여야 ‘교사’답게 아이들과 배울 만합니다.


- “선생님은 제가 한 일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지금 들은 것만 보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진 않구나.” “그렇군요. 그건 제가 중2라서요? 아님 상대방이 초등학생이라서? 말씀드렸지만, 이건 예민한 문제니까요. 만약 이것저것 다 캐물은 다음 납득이 안 가는 이유로 대충 마무리하고 처벌하면 저는 반성은커녕 절대로 용서 못할 거예요.” (116쪽)


 다케오미 겐지 님이 빚은 만화책 《스즈키 선생님》(세미콜론,2011) 1권을 읽습니다. 교사 자리에 섰으나 아직 교사라 할 만하지 않은 ‘어른 스즈키’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하고 마주하는가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책이름부터 선생님이라고 적습니다만, 교사와 선생님이라는 이름이나 허울이 어떠한가를 아직 옳게 짚지 못하는 ‘사람 스즈키’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가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이들과 지내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놓고 뾰족한 길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여러 날 골머리를 앓고, 오래도록 마음앓이를 합니다. 어른도 아이도 갈팡질팡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언제나 ‘수업 진도’가 맨 먼저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오락가락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늘 ‘시험 성적’이 가장 큽니다.

 수업 진도와 시험 성적이라는 쇠사슬을 스스로 동여맨다면, 학교는 그야말로 학교입니다. 배우는 터전인 배움터가 되지 못합니다. 배움터는 지식쌓기를 하는 데가 아니니까요. 삶터가 돈벌이만 잘해서 갖가지 전자제품이나 물질문명을 누리는 데가 아니듯, 배움터는 교과서 수업 진도를 잘 나가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철썩 붙도록 등을 떠미는 데가 아닙니다. 포근하며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고운 보금자리가 될 삶터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꿈이 예쁘게 어우러지는 사람들 좋은 이야기마당이 될 배움터입니다.

 만화책 《스즈키 선생님》은 참다운 교육이 걸어갈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교사다운 교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제도권 교육 울타리에서 아이들이 아이다움을 잃지 않고 어른들이 어른다움을 내팽개치지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대목을 살짝 보여줍니다. 그나마, 아직까지 한국땅에서는 이만 한 이야기조차 만화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글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보여주지 못합니다. (4344.9.27.불.ㅎㄲㅅㄱ)


― 스즈키 선생님 1 (다코오미 겐지 글·그림,홍성필 옮김,세미콜론 펴냄,2011.2.17.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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